친구와 벗
# 1.그야말로 땡볕, 눈이 따갑게 새파란 하늘의 끄트머리엔 열구름 몇 조각 꿈틀거리고….
내가 지금 이럴 시간이 아닌데, 어제 J사장의 급작스러운 제의를 거절하는 건데.
이곳 홍천강(洪川江)변의 야트막한 산처럼 일들이 쌓여 있는데 카약이나 하고 있다니….
가족과 직원들 내팽개치고 혼자서 이 호사를 누리다니.
홍천강은 이름도 별나군. 천(川)이면 천이고 강(江)이면 강이지…. 둔치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카누예요?”하고 묻네. 일행이
“카약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시끌벅적한 소리. 내기를 한 건가? 카약은 양날 노를
젓고, 카누는 한 날 노를 젓는다지.
배신감도 드는군. 어제 J사장이 “묻지 말고 저를 따라와 주세요” 하고 말할
때 설마 놀러 가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는데, 이 귀중한 시간에…. 아냐, 그래도 저
눈부신 하늘, 신록의 산, 초록 강 빛은 너무 아름다워, 이 순간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네.
J사장, 카이스트를 2년 만에 졸업한 천재답게 기발해. 가만, 그의 닉네임이 뭣이었지?
부인은 마리아였던가? 저기 부인과 함께 유유자적 노를 젓는 저 분은 도미니크였지?
그런데 왜 이분들은 닉네임으로 통할까. 익명성(匿名性) 때문일까? 그래 이름과 직급,
나이가 없으면 친해지기가 쉽겠네, 친구의 폭이 넓어지겠네.
그렇지, 미국에서도 두 딸에게 영어를 가르친 50대 후반의 로이스 선생님이 늘
우리 부부를 친구라고 불렀지. 우리나라에서도 나보다 몇 살이나 많은데도 나를 친구로
부르는 교수들이 있지만, 한두 살도 따지고 동갑이면 개월 수를 따지는 사람들, 우리밖에
없겠지? 일본이 그런다던가?
우리도 옛날에는 연장이배즉부사지(年長以倍則父事之) 십년이장즉형사지(十年以長則兄事之)
오년이장즉견수지(五年以長則肩隨之)라 해서 나이가 5~10년 차이 나도 말이 통하면
벗으로 삼았다는데…. 그래,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공부한 사람이 벗이지.
중국에서는 벗을 퉁쉐(同學)라고 한다지? 친구라는 말도 그래, 옛날에는 오래 사귀며
뜻이 통하는 사람만 친구로 불렀고 보통은 벗이나 동무로 불렀다는데….
# 2. 서울로 가는 승용차에서 J사장이 이실직고하는군. “예전 회사에서 네 살
많은 입사 동기가 술 마시고 제 자취방에 와서 잠을 자고 갔는데 이상하게 친해지데요.
이번에도 ‘스토리’를 만들려고 억지로 초청했지요. 토·일요일이 없는 벤처기업
사장의 특징을 잘 아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얘깃거리를 만들 수 없어서.”
‘우리가 만난 것만 해도 스토리인데…’하고 말하려다 속으로 꿀꺽. 우주가 생긴
지 135억~140억년, 태양계가 생긴 지 45억~50억 년, 지구에서 생명이 생긴 지 25억년
동안 어떤 자그마한 변화가 있었다면 당신을 ‘친구’로 만나지 못했을 텐데….
밤이 이슥해 회사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아파트 1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더니
어잉~ 두 딸이 복도에 있네. 첫애가 “아빠, 전쟁기념관으로 서태지 공연 보러 가지?”
하고 마치 친구에게처럼 ‘10% 불량하게’ 말을 걸어오네. “세영아, 아무리 친해도
친구에게나 하는 말투를 아빠에게…”라고 말하고 나서 속으로 물었다. 도대체 친구란
무엇일까. 그냥 편한 사이, 아니면 서로 존중하는 사이, 모든 것을 주는 사이, 무엇이
우리 시대의 친구일까.
이성주 코메디닷컴 대표
<이 칼럼은 중앙일보 6월 15일자 ‘삶의 향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