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산다고…” 가족이 노인치료 거부

치료하면 살 수 있는데도 치료비 이유로 방치 많아

“얼마나 산다고…” 가족이 노인치료 거부충북 청주에 사는 72세 이 모 할머니는 위염 약을 열심히 먹는다. 식욕부진, 소화불량

증상이 있어 1년 반 전에 병원에 갔었는데 의사와 가족 모두가 “위염”이라며 약만

드시면 된다고 했다. 문제는 약을 먹어도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증세는 위염이 아닌 위암이기 때문이다.

위암 초기였기 때문에 수술하면 완치할 수도 있었지만 가족들은 의사에게 “암이라고

알려 드렸다가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느냐”며 알리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고, 어차피

치료비를 보호자로부터 받아야 하는 의사는 가족의 ‘명령’을 따랐다.

이처럼 환자 본인은 치료를 받고자 하지만 가족, 보호자가 치료를 거부해 노인들이

치료 사각지대로 몰리는 사례는 의료계에서 셀 수 없다는 것이 의사들의 말이다.

이런 현상은 대법원이 존엄사를 허용함에 따라 앞으로 존엄사가 법적으로 허용되면

더욱 크게 문제가 될 전망이다. 존엄사가 금지돼 있어도 이런 일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데 앞으로 존엄사가 허용되면 노인들의 생명권은 더욱 궁지에 몰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방 병원에 근무하는 한 의사는 “보호자들이 ‘노친네는 나이가 많아 치료해도

소용없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치료를 거부하고 퇴원하는 경우를 수없이 봤다”며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존엄사가 도입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환자 의사 묻는 연명치료 중단 3.7% 불과

환자 본인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말기 암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가 중단되는 현상은

국립암센터 호스피스완화의료사업과 윤영호 박사가 2004년 국내 17개 병원의 현실을

조사한 논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윤 박사는 17개 병원에서 숨진 암 환자 1662명의 가족을 상대로 전화 인터뷰를

해 “왜 심폐소생술이나 중환자실 입원 같은 연명치료를 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연명치료를 한 경우가 10.5%에 불과한 이유에 대해 유가족들은 “의료진의 권고에

따랐다”고 대답한 경우가 65.7%였으며, 가족이 먼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한

경우도 27.1%나 됐다.

반면 환자 본인이 스스로 연명치료가 거부한 경우는 단 3.7%에 불과했다. 말기

암 환자 가운데 스스로 존엄사를 택한 경우는 3.7%에 불과하고 의료진 또는 가족이

환자의 마지막 순간을 결정하는 ‘존엄하지 않은 사망’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결론이었다.

윤 박사는 “환자가 생을 마감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이런 혼선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가 앞으로 존엄사 관련 법 제정에서 중요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족의 임의 치료중단과 존엄사 엄격 구분해야

고령 환자 또는 말기 암 환자 등에 대한 가족들의 치료 거부는 엄밀하게 따지면

의료법 위반 행위다. 의료법(16조 1, 2항)은 ‘의사는 환자로부터 진찰이나 치료를

요구 받은 때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진료 행위를 거부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에 예를 든 청주 할머니의 경우처럼 본인이 병명 자체를 몰랐고

따라서 위암 치료를 요구한 적도 없기 때문에 책임을 묻기 힘들다는 데 있다.

1997년 보라매병원 의료진이 가족의 요청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했다가 살인방조죄

혐의로 구속된 것도 사망자의 지인이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의 이런

문제 제기가 없다면 사망자는 말이 없고 가족과 의사는 침묵하기 때문에 사안 자체가

어둠 속으로 숨어 버렸을 것이다.

의료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이인재 변호사(법무법인 씨에스)는 “보호자가 환자

모르게 ‘더 이상 치료가 필요 없다’고 의사에게 얘기하고 의사가 이를 받아들여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환자가 사망 위험에 빠졌다면 문제가 되지만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문제가 드러나지 않으니 법적 책임을 묻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한림대의대 한강성심병원 내분비내과 유형준 교수(대한노인병학회 이사장)는 “치료하면

호전될 수 있는데도 치료를 거부하는 행위와,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이나 뇌사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행위는 분명하게 구분돼야 한다”며 “존엄사는 후자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존엄사 논의가 자칫 노인들에 대한 가족들의 치료 거부 명분이

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정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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