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 보며 걷는 거문도

쪽빛 바다 보며 걷는 거문도

날개 접고 야반도주한 갈매기가

새벽 첫차 타고 와 다시 날개 펴는 바다

서대 낙지 볼락 멸치 주꾸미 갯장어가

남부여대 보따리 이고 지고 이사 갔다

돌아와 제 새끼 가득 치고 사는 바다

………

모든 것 다 받아주는 바다가 거기 있어

기차는 약속처럼 바다로 돌아간다

기차가 종착역인 여수역에 닿기도 전에

맨발로 달려오는 누님 같은 푸른 바다

<정일근의 ‘모든 기차는 바다로 가고 있다’ 부분>

목넘이∼녹산등대 8.5km 쉬엄쉬엄 2시간

모든 배는 항구로 간다. 거문도는 여수앞바다 뱃길 끝에 있다. 여수와 제주도의

중간쯤에 있다. 여수에서 남쪽으로 114.7km, 제주에선 동북쪽으로 86km 거리를 두고

있다. 제주가 더 가깝다. 겨울 맑은 날엔 거문도 등대에서 눈 덮인 한라산 봉우리가

보인다. 제주갈치나 거문도갈치나 바다가 겹치는 부분이 많다.

거문항은 ‘우묵배미 항구’다. 바다의 천연요새다. 동도, 서도, 고도의 3개 섬이

어깨동무를 하고 ‘ㄷ자’를 만든다. ‘ㄷ자’의 터진 부분도 왱병 모가지처럼 좁다.

파도는 3개 섬의 등짝만 죽어라 때리며 화풀이를 해댄다. 가끔 수월산 앞 ‘목넘이’로

물을 넘겨보지만 그 정도로는 끄떡도 없다. 항구 안은 아늑하다. 잔잔한 호수 같다.

면적은 약 330만 m²(100만 평).

사람들은 3개 섬의 가슴과 갈비뼈 품 언저리에서 옹기종기 모여 산다. 주민은

인근 손죽도, 초도 등을 포함해 모두 877가구 1900여 명. 50대 이상이 대부분이다.

한때 주민이 1만1000여 명이나 된 적도 있다.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지은 이름

거문도(巨文島)는

‘문장이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사는 섬’이라는 뜻이다. 1885년 영국해군이 무단

점령하기 전까지는 ‘삼도(三島)’라고 불렀다. 당시 조선을 제쳐놓고 영국,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던 청나라 작품이다.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현지 사정을 살피기 위해

거문도 주민들과 자주 필담을 나눴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해박함에 놀랐다는

것이다. 정여창은 조선 조정에 섬 이름을 거문도로 해달라고 청했다. 고종실록에도

1885년 이후부터 ‘거문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거문도 바다는 쪽빛이다. 하늘은 남색이다. 섬 어느 곳에 있든 쪽빛바다가 출렁인다.

쪽빛은 아득하고 깊다. 몽환이다. 거문도 등대는 쪽빛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하늘이 바다를 만날 때/바다가 먼저 물드는 색깔/바다가 사람을 만날 때/사람이

먼저 물드는 색깔/사람이 사랑을 만날 때/사랑이 먼저 물드는 색깔’ <정일근

‘쪽빛’ 전문>

등대에 오르는 길은 한갓진 동백 숲길이다. 동백꽃은 이미 지고 없다. 천연기념물

흑비둘기가 산다. 새가 노래하면 파도가 반주를 넣는다. 우묵사스레피나무나 갯고들빼기

갯무도 있다. 목넘이에서 1.3km(30분 거리) 수월산(해발 196m)을 지난다. 어린이나

노인들도 걷기에 전혀 부담 없다. 시골마을 고샅길 걸어가는 기분이다. 수월산의

‘수월(水越)’은 ‘파도가 뭍을 타고 넘는다’는 뜻이다. 곧 이곳사람들이 말하는

‘목넘이’의 한자어다. 큰 파도가 몰려오면, 움푹 들어간 목넘이 부분은 부서지는

하얀 물거품으로 아수라장이다. 태풍이 불면 발 묶인 관광객들이 이 장관을 보면서

뱃길 끊긴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거문도 등대에선 바다에서 두둥실 솟는 붉은 해가 황홀하다. 미끄덩 물속에 가라앉는

홍시 같은 해가 아득하다. 길 잃은 배는 불빛을 보고 눈을 뜬다. 등대는 1905년 4월

남해안에서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불빛이 마라톤코스와 비슷한 42km나 나간다. 한국

최초의 유인 등대인 인천 팔미도 등대(1903년)보다는 늦지만 부산 영도 등대(1906년)나

포항 호미곶 등대(1908년), 제주 마라도 등대(1915년), 울산 간절곶 등대(1920년)보다는

앞선다. 불빛이 55km나 뻗었다는 인류 최초의 이집트 파로스 등대(BC 280년)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서도엔 면사무소 경찰서 우체국 등 행정관청이 몰려 있다. 아직까지 일본식 집들도

남아 있다. 영국군 묘지는 면사무소 뒤쪽으로 600m쯤 돌아가면 있다. 거문초등학교

자리가 영국군 주둔자리다. 병사들은 축구와 테니스를 즐겼다. 가는 길 주위엔 말쑥하게

자란 쑥밭 천지다. 거문도 사람들은 한 해 쑥을 3번이나 딴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큰 쑥이라 품질도 으뜸이다. 보통 쑥으로만 한 해 400만∼500만 원씩 소득을 올린다.

쑥밭이 금밭이다.

영국군 묘지엔 원래 9기의 무덤이 있었다. 1887년 영국군이 물러간 뒤 경락사

이원회가 조선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그 이후 하나 둘 본국으로 이장해 가면서

현재는 2, 3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식 묘지석과 나무 십자가가 서

있다. 해마다 주한 영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참배를 빠뜨리지 않는다고 한다.

정용현 씨(60)는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해마다 한번씩 영국 군함이 상륙해서

묘소를 살폈다. 그 땐 온 섬이 축제나 마찬가지였다. 영국 수병들은 올 때마다 주민들을

위해 각종 공연을 벌이는가 하면, 그때껏 듣도 보도 못한 선물을 듬뿍 나눠줬다”고

말했다.

구한말 의병장 임병찬의 유배지

서도 해안 길은 목넘이에서부터 시작된다. 쉬엄쉬엄 가도 2시간(8.5km)이면 충분하다.

목넘이∼거문도(유림)해수욕장∼삼호교∼거문도 뱃노래전수관과 서도(이금포)해수욕장,

녹산 등대까지 맞닿아 있다. 마을은 이 길을 따라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있다. 삼치,

갈치 잡이 배들도 발품을 쉰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맛있다. 바닷바람이 살갗을

어루만진다.

덕촌 마을은 한말 의병장 임병찬 의사(1851∼1916)가 단식 끝에 돌아가신 곳이다.

전북 옥구 출신 임 의사는 1905년부터 줄기차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일본 대마도까지

잡혀갔던 분. 1914년 다시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돼 거문도로

유배됐다. 덕촌마을 앞에는 임 선생의 순지비(殉趾碑)가 서있다.

목넘이에서 잠시 샛길로 빠져 보로봉∼신선바위∼기와집몰랑∼거문도해수욕장

코스는 아버지와 아들이 인생을 얘기하며 걷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거리.

보로봉의 해돋이 해넘이, 기와집 모습의 바위들, 쪽빛 바닷물에 뿌리를 박은 신선바위….

아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

아버지는 늘 가족사진 밖에 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이라는 두 개의 색상 경계에

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이다. 쪽빛과 남색이 잠시 어우러지는 섬이다.

역사 소설가 홍성원(1937∼2008)은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 바다를 노래한다. 그렇다.

아들과 아버지는 언젠가 바다에서 만난다.

‘한 개의 선과 두 개의 색상이/바다가 만드는 구도의 전부다/가장 큰 것이 가장

단순해서/바다는 우리를 감동시킨다/우리가 다시 바다에서 만난다는 것은/더 할 수

없는 축복이다’

김화성 전문기자mars@donga.com

열강이 탐내던 해상요새

1885년

4월 15일 영국은 군함 3척(대포 76문, 617명)과 수송선을 동원해 거문도를 무단 점령했다.

이유는 러시아가 먼저 거문도를 장악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4월 20일

청나라와 일본 정부에 거문도 점령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조선 조정엔 한 달도 더

뒤인 5월 20일에야 통보했다. 영국은 조선을 야만국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다. 영국은 그후 8월 중순까지 군함 11척과 해병대 100여 명을 더 파견했다.

영국은 오래 전부터 거문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손바닥 보듯이 환하게 알고 있었다.

1845년 영국 해군 탐사선이 제주도∼거문도 해역을 한 달 동안 샅샅이 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들의 지도엔 이미 거문도가 포트 해밀튼(Port Hamilton)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해밀튼은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 이름.

러시아도 거문도의 중요성을 영국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1854년 4월 러시아

황제 특사 푸차친이 기함 팔라다 호를 타고 거문도에 상륙해 11일간 머물렀을 정도였다.

조선과 영국은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조선과 러시아는 1884년 조러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조선 땅은 부동항을 얻기 위하여 남하정책을 펴고 있던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영국의 각축장이 된 것이다.

조선 조정은 뒤늦게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와 엄세영을 일본 나가사키에 보내 영국

해군 함대 사령관 윌리엄 도드웰 중장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영국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청나라 리홍장과 협상을 벌였다. 청나라도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실히 다지기

위해 거문도 사건을 이용했다. 청나라가 거문도 주인이라도 되는 듯 영국, 러시아와

협상을 벌인 것이다. 조선 조정은 당사자이면서도 협상에서 완전 ‘왕따’ 당했다.

결국 러시아는 향후 10년 동안 조선 땅 어느 곳도 점령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영국도 23개월 만에 거문도에서 철수(1887년 3월 1일)하기로 했다. 청나라의 리홍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조선 땅에서의 지배력을 굳히게 된

것이다. 조선은 청나라의 소맷자락에 더욱 매달렸다. 청나라는 1895년 을미사변 때까지

8년 동안 조선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여행정보|

▽서울-여수 △항공기= 김포∼여수 매일 18회 운항 △기차= 용산∼여수 매일 12회

△고속버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50분 간격(4시간 반 소요) △승용차= 경부고속도로→대진고속도로→진주나들목→남해고속도로→광양나들목→여수행

17번 국도

▽여수∼거문도 여객선(2시간 10분 소요)= 하루 2회, 거문도사랑호(061-662-1144)

8시, 14시 20분. 오가고호(061-663-2824) 7시 40분, 14시(3만6600원)

▽백도 유람선관광(거문도여객선터미널 061-666-8215)= 여수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거문도에 도착한 후 30분 지나 출발. 하루 2회(2만2000원), 소요 시간 왕복 2시간.

39개의 무인 군도로 기암괴석이 절경. 국가명승지 7호 지정. 사람이 섬에 오르는

것은 금지돼 있으며, 배를 타고 섬 주위를 둘러볼 수 있다.

▽거문도 먹을거리= 섬마을횟집(061-666-8111), 강동식당(061-666-0034), 충청도

횟집(061-665-1986)

▽거문도 민박= 터미널민박(061-665-8281), 풍난민박(061-666-8008), 엑스포민박(061-666-8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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