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없다’와 ‘쓸 사람 없네’가 만나면…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을 전후해 세계인들로부터 IT(정보통신) 강국이라는 별칭을
듣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정보화’라는 이름 아래 강력한 정보통신 정책을 펼친
이후 15년여 만에 제법 센 브랜드 네임(brand name)을 얻게 된 셈이지요.
개발도상국에서부터 경제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 국의 경제전문가들이
한국의 IT 발전사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성공 비결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살짝 들여다 본 이들은 문화와 기질을 논합니다. 신기술 새 모델을 선호하는 성향(신상품의
시장 안착 가능성을 높입니다), 잠시의 멈칫도 용서하지 않는 ‘빨리빨리’ 문화(정보통신의
속도 경쟁을 부추깁니다), 젓가락 식습관을 통해 발달된 섬세한 손놀림(뛰어난 기술
개발 능력의 원인이 됩니다), 옆 사람과 비교해 지기 싫어하는 성격(새 모델의 확산
속도를 높입니다) 등을 말하지요.
약간 더 더듬은 이들은 정책을 얘기합니다. 먼 훗날을 생각해 정부 부처 개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추진해 온 한국의 정보통신 정책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돈이면
한강 다리 하나 더 놓을 수 있다” “전화 없어도 산다. 당장 먹고 살기 바쁜데 정보화가
웬 말이냐” 등 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책 속에 담긴 비전을 믿고 세차게 밀어붙였던
시간을 얘기합니다.
진짜 면밀하게 분석한 이들은 ‘사람’을 꼽습니다. 정책을 만들고 추진했던 사람들의
땀과 열정을 부러워합니다. 첫 번째 자리에 김재익을 올려놓습니다. 5공 초기 청와대
경제수석이었지요.
결국 ‘사람’이 일궈낸 한국 IT 발전사
전화기 한 대 값이 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값이던 시절, ‘이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통신 부문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TDX(전전자교환기)
도입 개발을 결심하지요. TDX는 통신 산업을 자체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제일
뿐 아니라, 워낙 다양한 전자기술이 투영된 까닭에 ‘전자 산업의 꽃’으로 불리었습니다.
김재익은 ‘TDX 개발 = 한국 경제의 성장 기반’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어 신념을 함께할 인재들을 끌어들입니다. 오명 청와대 경제과학비서관, 경상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부소장, 정홍식 대통령 경제비서실 비서관, 양승택 한국전기통신연구소
TDX개발단장, 서정욱 한국통신 TDX사업단장 등이 그들입니다.(직함은 1981년 당시)
“TDX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혈서를 씁니다.
밤낮 없는 4년이 지나갑니다. 결국 1986년 3월 TDX 국산화에 성공하지요. 이들이
대한민국 IT 1세대들입니다. 황무지에서 첫 삽을 떠 옥토를 만든 ‘사람’들이지요.
일자리가 없다고 야단입니다. 경제는 물론 여타 정책의 앞머리에 일자리 창출이
놓여 있지요. 대기업은 신규 채용 늘리기와 고용 수준 유지에 나서는 등 어떻게 하든
정부 정책에 부응하는 모양을 만들려 애쓰는 모습입니다. 돈도 있고, 사람도 있어
보입니다.
갈 곳 챙겨두는 ‘뜨내기 인재’ 어쩔 것인가
눈길을 끄는 곳은 중소기업, 특히 직원 100명 미만의 작은 기업입니다. 흔히 자금
문제를 말합니다. 하지만 더 큰 고민은 ‘사람이 없는 현실’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일 이외에는 쳐다보지 않는 ‘독립성(?) 강한 전문가’는 많다는군요.
자신을 받아 줄 다른 곳을 항시 챙겨 두는 준비성 좋은 ‘뜨내기(?) 인재’도
넘쳐난다고 합니다. 문제는 기업이 지닌 신념과 비전을 공유하면서, 열정으로 밤낮을
일궈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사회 현상의 한 측면일까요. 일본의 사회평론가 미우라 아쓰시는 그의 책 ‘하류사회’에서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계층 집단을 얘기합니다.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그날그날
편히 살고 싶어 하지요. 그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이를 자기답게 사는 것으로 여깁니다.
나아가 이 같은 삶의 방식을 시스템에 대한 저항으로 확대하면서, 시원하다거나 진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승 의지가 있을 리 없지요. 치열한 생존경쟁 시스템에서 승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임금 부분 노동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명 문제가 있지요.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냐고요? 미우라 아쓰시는 ‘생활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고 진단합니다.
‘일자리 없다’와 ‘사람 없다’가 부딪히는 이 때, 신념과 비전을 공유하며
머리를 맞대 밤낮으로 열정을 쏟았던 IT 1세대들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