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해안길-서산 절길 걷기

안면암 너머 장한 노을, 개심사 어귀 붉은 동백

태안 해안길-서산 절길 걷기

봄은 이미 충남 태안 서산 앞바다 개펄에 걸쭉하게 와 있었다. 뻘밭은 탱탱 불어터졌다.

어찔어찔 젖몸살을 앓고 있었다. 바닷물은 우르르 떼로 오가며, 달아오른 개펄의

이마를 식혀주고 있었다.

바람꽃은 아직 찼다. 하지만 그 속엔 어김없이 따뜻한 봄 씨앗이 꿈틀거렸다.

갯벌은 차지고 달았다. 모래밭은 말랑말랑 부드러웠다. 조개들은 그 뻘밭이나 모래밭

캔버스에 꾸불꾸불 뭔가를 끊임없이 그려댔다. 동죽,  새조개, 바지락, 가리비,

맛조개, 밀조개, 모래조개들이 온몸으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태안 안흥항 갯바위에선 낚시꾼들이 우럭 낚기에 코를 박고 있었다. 안흥 성곽

길 잔등엔 어린 쑥들이 우우우 올라왔다. 냉이 달래가 파릇파릇 싹을 올리고 있었다.

서산 개심사 입구엔 늙은 할머니들이 웅크리고 앉아, 봄나물을 팔고 있었다. 그 옆

동백나무 울타리에선 붉은 동백꽃이 배시시 웃었다. 매화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몽산포∼청포대해수욕장 모래밭 5km 넘어

태안 해안에서 안면도까지 이르는 길은 뻘밭과 모래밭이 뒤섞인 길이다. 해안포장도로를

따라 걷다가 해수욕장 모래밭이나 개펄로 들어가면 별세계가 펼쳐진다. 맨발로 모래밭을

걸으면 온몸이 간지러워진다. 말랑말랑해진다. 와락 봄 기운이 모세혈관을 타고 밀려든다.

처음엔 발이 시려 얼얼하지만, 조금만 참으며 걷다 보면 발바닥이 화끈거린다.

아예 양말을 신고 걷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개펄은 아직 맨발로 들어가기엔 무리다.

자칫 조개껍데기에 맨살을 베일 위험도 있다.

해수욕장은 태안 쪽에 화암포, 구례포, 신두리, 구름포, 의항, 방죽골, 천리포,

만리포, 어은돌, 파도리, 통개, 갈음이, 몽산포, 달산포, 청포대, 마검포, 연포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몽산포에서 청포대해수욕장에 이르는 모래밭은 길이가 5km가 넘는다.

축제 땐 10km 모래밭 단축 마라톤 대회가 펼쳐지는 곳이다. 청포대에서 몽산포를

바라보면 아득하다. 가물가물하다. 바닷물이 빠지는 오후엔 모래밭이 운동장처럼

넓다. 발바닥 감촉도 켜켜이 다르다. 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모래가 몽글고, 바닥도

단단하다. 밖으로 나올수록 모래는 굵어지고, 발이 푹푹 빠진다. 사람들은 파도가

우르르 밀려올 땐 “와아!” 하며 달려 나오고, 파도가 주르륵 빠질 땐 “우우”

하며 쫓아간다.

안면도에도 해수욕장이 백사장, 삼봉, 기지포, 안면, 두여, 밧개, 방포, 꽃지,

샛별, 장삼, 장돌, 바람아래 등 12개나 있다. 이 중 꽃지는 모래밭이 3km가 넘는다.

어슬렁어슬렁 걸으면 왕복 2시간은 걸린다. 류재훈 씨(48·교사)는 “서해안에도

이렇게 큰 해수욕장이 있는 줄 몰랐다. 모래밭을 걷고 나니, 세상에서 찌든 때가

모두 휘발되어 날아가 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꽃지해수욕장의 일품은 누가 뭐래도 낙조다. 할미섬과 할아비섬 사이로 지는 붉은

해는 새색시 연지처럼 앙증맞다. 장엄하거나 거창하지 않아 좋다. 문득 이철수 씨의

판화에 ‘지는 해’라는 제목의 글귀가 떠오른다. ‘해가 서산에 지더라/큰소리로

이야기하더라/나 진다!/구차히 살지 말아라’

서산 땅은 소박하고 정갈하다. 안온하고 아늑하다. 양지바른 언덕 같다. 낮은

땅과 둥글고 야트막한 산, 길쭉길쭉하게 나타나는 붉은 황토밭, 푸른 겨울마늘 밭

너머 질펀하게 누워 있는 개펄….

서산엔 ‘곱게 늙은 절’이 많다. 개심사, 일락사, 천장사, 부석사, 간월암, 망일사,

죽사, 서광사, 문수사, 송덕암 등 하나같이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닮았다. 가운데 석가여래입상의

초승달 눈썹과 순박한 웃음을 짓고 있는 도톰한 입술 같다.

서산의 절들은 제2의 원효로 불리는 ‘길 위의 큰 스님’ 경허 선사(1849∼1912)와

그의 제자 만공 스님(1871∼1946)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천장사엔 경허가

3년간 수행한 0.5평짜리 쪽방이 있다. 부석사 심검당(尋劒堂) 현판은 경허가, 큰

방에 걸려 있는 부석사(浮石寺) 현판은 만공이 썼다. 간월암(看月庵) 현판 글씨도

만공 것이다. 부석사엔 만공이 수행하던 토굴도 있다. 서울에서 온 강영실 씨(28·시민단체

근무)는 “부석사의 만공 스님 수행 토굴에 들어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더니, 내

자신이 끝없이 확장돼 우주와 맞닿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경허는 주로 천장사에 묵으며 개심사 부석사에 오갔다. 경허는 체격이 건장했다.

얼굴도 부리부리한 달마 같았다. 어느 날 경허는 제자 만공과 탁발을 하고 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자 만공의 등에 지고 있는 바랑은 가득했다. 만공이 말했다. “스님, 걷기에

힘이 듭니다.” 하지만 경허는 묵묵히 앞장서 걸을 뿐이었다. 얼마 후 어느 마을을

지나가게 됐다. 무슨 일인지 마을 청년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이때 갑자기 경허가

마을 아낙네를 덥석 안더니 입을 쪽 맞춰버렸다. 그리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화가

난 마을 청년들이 몽둥이를 가지고 뒤쫓았다. 만공도 엉겁결에 죽어라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청년들이 뒤쫓아 오지 않게 되자, 경허가 만공에게 물었다. “아직도

걷기에 힘이 드느냐?” 만공은 비로소 크게 깨달았다.

부석사∼간월암 13km 탁발하며 걷던 길

부석사에서 간월암에 이르는 13km 길은 늙은 스님이 탁발하며 걷는 길이다. 저잣거리

중생들의 보시를 받으며 깨달음을 얻는 길이다. 높은 산에서 낮은 바다로 가는 ‘낮춤의

길’이다. 산중의 경 읽는 소리와 바닷물의 독공 소리가 어우러진 길이다. 어쩌면

경허와 만공이 탁발하러 다녔던 길인지도 모른다. 아기자기한 들길 사이로 걷는 맛이

쏠쏠하다. 내려갈수록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는 점점 진해진다.

3, 4시간이면 넉넉하다.

서산 부석사는 경북 영주 부석사와 이름과 창건 설화가 똑같다. 부석사는 도비산(351.6m)

중턱에 있다. 300∼400년 된 늙은 팽나무 느티나무들이 절집 주위를 지키고 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뜨인 돌 같고, 내려다보면 바둑판 같은 들과 서해바다가 쏙 들어온다.

간월암은 밀물 때는 바닷물에 떠 있고,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 암자다.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바뀐다. 보통 오후 1∼4시엔 걸어서 갈 수 있고, 바닷물이 찼을

땐 널빤지 배로 건널 수 있다. 휴일엔 사람이 너무 많아 짜증난다. 간월암 옆 개펄이

아슴아슴 볼만하다. 해미읍성에서 개심사에 이르는 8km 길은 부처님 땅으로 들어가는

고즈넉한 길이다. 적멸로 가는 길이다. 길은 국립종축장의 낮은 구릉 사이를 S자로

구불구불 들어간다. 개울에선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버들강아지엔 물이 듬뿍 올랐다.

개심사 일주문은 저잣거리와 미륵 세상의 경계다. 섬돌 계단 150여 개를 밟고 오르면

곱게 늙은 시골 노인이 앉아 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절집은 검버섯이 여기저기 피었다.

박동규 씨(55·회사원)는 “땅도 소박하고, 사람도 꾸밈이 없고, 절도 때가

묻지 않아 좋다. 골짜기마다 이렇게 단아하고 아담한 절들이 자리 잡고 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경허는 졸음을 쫓기 위해 송곳을 턱밑에 받쳐 놓고 수행했다. 문둥병 여인과 몇

달 동안 같이 살기도 하고, 일부러 남의 아녀자를 희롱한 뒤, 묵묵히 몽둥이 세례를

견뎌보기도 했다. 술과 고기도 잘 먹었고, 말년엔 서당 훈장으로 산골(함경도 갑산)에

숨어 살다 죽었다. ‘마음달 외로이 둥그니/빛이 만상을 삼켰구나/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다시 이것은 무엇인가’ 그의 임종게다. 만공은 거울 앞에서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 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욕 봤네” 하고

눈을 감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여행정보|

충남

서산 태안은 어리굴젓으로 유명하다. 간월암에서 수행하던 무학 대사가 이성계에게

어리굴젓을 보내면서부터 진상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요즘도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만조 때를 맞춰, 굴 풍년을 기원하는 ‘굴 부르기 군왕제’가 펼쳐진다.

간월도에는 어리굴젓 기념탑도 있다.

천수만에서 자라는 서산 굴은 씨알이 작다. 알이 굵은 다른 지방의 굴에 비해

반 정도밖에 안 된다. 성장 속도가 느린 탓이다. 굴은 좋은 햇볕을 많이 받으면 성장이

멈춘다는 게 이곳 주민들의 설명. 하지만 서산 굴은 작지만 맛이 달고 차지다. 더구나

굴 둘레에 돋은 잔털 같은 게 7, 8겹이나 된다. 그만큼 고춧가루 등의 양념이 골고루

잘 밴다. 씨알이 굵은 굴은 상대적으로 잔털이 드물다. 양념이 잘 배지 않는다.

서산 어리굴젓은 천일염으로 15일에서 2개월까지 발효시키며 고추도 햇볕에 말린

것만 쓴다. 고춧가루가 굴에 충분히 배어 숙성되면, 맛이 고소하고 얼얼해진다. 그래서

어리굴젓이다. 양념 조선간장으로 비벼 먹는 굴밥도 일품이다. 간월도 입구에 있는

‘춘자네’(SK간월휴게소 LPG주유소 내·011-9838-7091, 011-381-3210)가 유명하다.

어리굴젓 1만∼2만 원.

▽고속버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태안 서산행, 서산 공용버스터미널이나 태안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 이용

▽승용차= 서해안고속도로∼서산 나들목(△부석사: 국도 32호선∼서산∼지방도

649호선∼부석∼부석사 △간월암: 국도 32호선∼서산∼지방도 649호선∼부석∼서산AB지구방조제∼간월암

△개심사: 서해안고속도로∼해미나들목∼해미읍성∼개심사)

△태안 해안 길: 서해안고속도로∼서산 나들목∼태안∼해안도로

    코메디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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