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항소심도 “연명치료 멈춰라” 존엄사 인정
재판부 “인격권, 자기 결정권 인정”
법원은 사상 첫 존엄사 관련 항소심에서도 환자가 치료 중단 의사를
평소 밝혀 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며 식물인간 상태인 김 모(여ㆍ75) 할머니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인정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 9부(이인복 부장판사)는 10일 열린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 제거 등 청구소송'에서 김 할머니에 대한 연명 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요구한 자녀들의 손을 1심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들어 주며 “병원은 김 씨를
연명시키고 있는 인공 호흡기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에 앞서 이번 사건을 역사적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안락사’나 죽음을 지나치게 미화한 ‘존엄사’라는 용어로 표현하지 않겠다고
전제한 뒤 “이 사건은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가 자연스럽게 죽을 권리를 허용할 수
있는가, 있다면 허용 조건이 어떤가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 이유에서 지난 2008년 11월 28일에 열린 1심의
증거나 사실 인정 등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앞으로 연명 치료 중단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엄격한 충족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네 가지 원칙을 밝혔다.
1. 환자는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비가역적 진행 과정에 있어야
하며, 주치의 1명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2. 치료 중단 의사는 일시적 충동이 아니라 진지하고 합리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사전 의료 지시서가 좋은 예이지만, 사전 의료 지시서가 없더라도
판단은 가능하다.
3. 환자의 현 상태를 유지하는 연명 치료에 대해서만 치료 중단의
결정이 가능하다.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치료 등에 대해서는 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없다.
4. 치료 중단 실행은 반드시 의사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위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기 때문에 피고
병원은 원고의 뜻에 따라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환자가 평안을 찾게 도와
줘라”고 판결했다.
이어 재판부는 “이번 사건은 환자와 병원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일반적인 의료 소송과는 달리 병원은 환자의 요구에 반대하며 어떤 기준이 마련되기를
희망하고 있다”며 “이 사건은 관련법이 없고 사회적 관심이 큰 상황에서 공통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한 선도적 사례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 결과만 발표했을 뿐 판결문 자체는 3일 이내에
법원 홈페이지에 공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재판부는 이번 판결이 자칫 연명 치료 중단에 관해 오해와
남용을 불러올 것에 대해 우려했다.
재판부는 “지금도 의료 현장에서는 의료진과 환자, 가족들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이번 판결로 인해 자칫 이들의 노력을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될까 우려된다”며 “인간의 생명은 최상의 가치로,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복이 불가능하고 환자의 명확한 의지가 충족되었을 때만 치료
중단이 허용된다”고 강조했다.
가족 측 변호인인 백경희 변호사(법무법인 해울)는 “기대했던
판결”이라며 “병원이 환자가 받을 고통을 감안해 상고하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
항소하기에 앞서 대법원의 판단을 받기 위해 비약상고를 환자
측에 제안했던 세브란스 병원 측은 “판결문을 받아보고 병원윤리위원회와 경영자회의를
거쳐 신중히 판단해 상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번 판결은 1심 판결과 같이 환자 본인이 평소 서면이 아닌 구두로
존엄사 의지를 밝힌 것이 확인될 경우 제한적으로 존엄사를 허용할 수 있다는 판례를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법률에 근거한 기준이 제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유사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법원에서 판단해야 하는 문제점이 노출됐다.
작년 2월 병원에서 폐 조직검사를 받다가 출혈로 인해 식물인간
상태가 된 김 씨에 대해 자녀들은 평소 어머니가 존엄한 죽음을 원했다며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소송을 냈고, 이에 작년 11월 서울서부지법은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다며 인공호흡기 제거 판결을 최초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