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고 달리면 어느덧 내 몸은 새털
망우리묘지의 달림이들
“달리기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가장 싸우기 힘든 상대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다른 선수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적이 아니다. 뛰어 넘어야 할
대상은 자기 안에 있다. 머리와 가슴에서 자신의 자아와 감정을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글렌 커닝엄(1909∼1988. 미국. 7세 때 큰 화상으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 권유에도 이를 거부. 배밀이와 걸음마부터 시작해
1934년 1500m 세계신기록, 1936년 베를린 올림픽 1500m 은메달)
“삶과 죽음 묵상하며, 잃어버린 나를 찾아 달린다”
마라톤은 사색운동이다. 명상운동이다. 달리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온갖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달리기는 단지 ‘더 빠르게, 더 멀리’ 가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
팔다리가 움직이기 전에 이미 마음이 먼저 달린다. 마라톤은 몸과 마음의 대화 과정이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동아일보 마라톤(3월 15일) D-37. 시즌 첫 오픈대회. ‘달림이’들이 한 해 처음으로
몸을 열고, 몸을 푸는 대회다. 달림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몸을 만들고 있을까? 훈련
시간은 얼마나 될까?
요즘 망우리공원묘지 코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 남산순환도로, 한강 둔치와
함께 ‘수도권 3대 환상 달리기 코스’로 떠오르고 있다.
망우리공원묘지 순환 코스(사색의 길) 한 바퀴는 5.2km. 아차산(285m) → 용마산(348m)
→ 망우산(281m)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지도상으로도 10km가 넘는다. 야트막한 데다
오르막내리막이 적절하게 자리 잡고 있어 왕복 150분 크로스컨트리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달림이들은 평소엔 집 가까이에서 연습하다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이곳을 찾아 ‘안
쓰던 근육’을 키운다.
‘망우(忘憂)’는 시름을 잊는다는 뜻. 모두 저승에 가서야 비로소 ‘강 같은
평화’를 얻었다. 순환 코스에는 문일평, 오세창, 한용운, 장덕수, 설의식, 이중섭,
박인환, 지석영, 방정환, 조봉암, 계용묵, 김말봉, 채동선 등 귀에 익은 이들의 묘소가
있다. 하나같이 야트막하고 소박하다. 이들은 죽어서도 저잣거리 사람들 사이에 묻혔다.
그 주위에는 번호만 붙어 있거나 ‘전주이씨의 묘(全州李氏之墓)’ 식으로 간단하게
표시만 한 무덤 1만5000여 기가 낮게 누워 있다.
유준상(67, 최고 기록 5시간, 풀 코스 3회 완주) 대한인라인롤러연맹 회장은 “이곳에
와서 달리다 보면 망자들에 대한 여러 상념이 떠오른다. 보물이 창고에 가득하면
뭐 하겠는가. 흙으로 가더라도 건강하게 가야 한다”고 말했다.
태양이 붉게 묘지 위로 떠오르는 이른 아침. 아침 햇살에 풀잎 이슬 같은 인생.
달림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달릴까?
내로라하는 ‘강호의 고수들’을 망우리 코스로 초청해 그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① 유철성(63, 엔지니어, 162cm 56kg)= 최고기록 3시간15분. 1996년 입문,
풀 코스 완주 30여 회. 산행 50년, 사이클 10년, 트라이애슬론 4년 경력(수영 3.8km,
사이클 180.2km, 마라톤 42.195km의 킹 코스 34시간 주파). 10km 거리의 직장 출근도
매일 뛰어서 한다. 밤엔 헬스장, 휴일엔 산을 가거나 사이클을 탄다. 술, 담배도
안 하고, 평생 아파서 누워본 적 도 없다. 요즘 일주일에 80km쯤 달린다. 동아대회에선
3시간50분대가 목표.
“아차산 망우리 코스는 흙 바닥이어서 무릎에 부담이 적다. 남산은 오르막내리막이
500m에 불과하지만 이곳은 2.5km나 된다. 경사도 완만해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마라톤은 욕심 부리면 안 된다. 꼭 누굴 이겨야 되겠다는 생각도 금물이다.”
② 김정남(41, 개인사업, 161cm 51kg)= 최고 기록 4시간01분. 2004년 입문,
풀 코스 완주 5회. 울트라마라톤 100km를 14시간21분에 주파했다. 요즘 일주일에
80∼90km를 달린다. 수, 토요일엔 월간잡지 러닝라이프에서 운영하는 3개월 프로그램에
나간다. 3시간30분 기록이 목표. 사업하랴 운동하랴 눈코 뜰 새 없지만 남편과 함께
달리는 맛이 쏠쏠하다. 부부간 대화가 늘었고, 성격도 긍정적이 됐다.
“70, 80세 넘어서도 신나게 달리는 게 꿈이다. 멀리 내다보고 차근차근 체력을
키우고 있다. 틈틈이 헬스장에서 보조운동도 한다. 마라톤은 온 가족이 함께 달리면
더욱 좋은 운동이다.”
③ 정기옥(46, 주부, 160cm 53kg)= 최고기록 3시간42분. 2005년 입문,
풀 코스 완주 13회. 노원육상연합회 소속. 잠실 보조경기장 중랑천 망우리 코스에서
일주일에 60km쯤 달린다. 동갑내기 남편(최고 기록 3시간11분)과 나란히 달린다.
남편은 응원 나왔다가 뒤늦게 달리기에 빠졌다(풀 코스 5회). 지금은 자신을 추월해
이것저것 챙겨 주고 조언까지 해줄 정도로 도사가 됐다. 목표는 3시간25분.
“소화 기능이 안 좋아 시작했는데 이젠 말끔히 사라졌다. 모든 일에 자신감도
붙었다. 42.195km도 뛰었는데 이 세상에 못할 게 뭐 있나 라는 생각이 든다. 마라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철철 기를 불어넣어 준다.”
④ 정해강(50, 엔지니어, 172cm 63kg)= 최고기록 2시간49분. 2001년 입문,
2003년에 서브스리(마라톤 풀 코스를 3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 진입. 풀 코스 완주
20회. 수영과 헬스를 하다가 한강 둔치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보고 빠졌다. 요즘 훈련
거리는 일주일에 70∼80km. 목표는 2시간47분 이내. 올 다른 대회에선 2시간57∼59분대를
유지할 계획이다. 2시간40분대와 2시간50분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난다. 부인은
탁구 마니아. 망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온다.
“지난해 동아 마라톤대회에서 식이요법을 했는데 별 재미를 못 봤다. 아마추어는
시늉만 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잘못 하다간 체력이 바닥나고, 리듬과 밸런스가 깨진다.
몸이 추위에 민감해져 감기가 올 수도 있다.”
⑤ 정춘옥(54, 개인사업, 157cm 52kg)= 최고기록 4시간19분55초. 2007년
입문, 풀 코스 완주 7회. 불수사도북 5산 종주(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를
10시간 30분에 주파했다. 목표는 4시간 이내인 서브포. 감기를 달고 살다가 산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달리기에 빠졌다. 요즘엔 일주일에 3번 북한산 도봉산에 오르고
목요일엔 남산에서 오르막내리막 훈련(12km)을 한다. 약콩, 현미, 조, 수수 등 모든
곡식을 10년째 생식하고, 물도 약수만 떠다 마신다.
“한번 풀 코스를 달리고 나면 보약 두 제를 지어 먹는 거와 같다. 처음 달릴
땐 팔에 돌을 단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몸이 새털 같다. 먹는 것을 조심하고 땀을 흘리니
몸 속 노폐물이 남김없이 빠져 나오는 기분이다. 자기 몸은 자신이 미리 알아서 책임지는
수밖에 없다.”
⑥ 박종석(55, 회사원, 165cm 56kg)= 최고 기록 3시간12분. 1970년대 입문,
풀 코스 완주 100여 회. 20대 중반 땐 2시간45분까지 달려봤다. 군에 있을 땐 대표로
뽑혔을 정도. 산행 30여 년, 암벽 빙벽 스포츠클라이밍 고수다. 일주일에 사흘을
망우리에서 총 30km쯤 달린다. 목표는 서브스리 진입. 뭐든 너무 빠져들다
보면 오래 못 간다는 생각이다.
“망우리 코스는 남산보다 공기가 맑고, 산 자들의 아파트와 죽은 자들의 무덤을
동시에 볼 수 있어 느끼는 게 많다. 저 멀리 한강까지 내려다 보여 풍광도 좋다.
달리기는 중독성이 강한데 그냥 편안하게 즐겼으면 좋겠다. 생활체육일 뿐이다.”
⑦ 김양임(46, 주부, 159cm 44kg)= 최고 기록 3시간42분11초. 2006년 입문,
풀 코스 완주 6회. 분당검푸동호회원. 주로 탄천에서 일주일에 30여 km를 달린다.
목표는 3시간30분 이내 진입. 매일 수영(1시간), 헬스(2시간) 등 총 3시간씩 근육
운동을 한다. 남편과 같은 동호회에서 나란히 달릴 수 있어 행복하다.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말이 잘 통한다. 3시간30분 이내에만
들면 그 다음부터는 즐기면서 달리고 싶다. 때론 달리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땐 ‘이 순간만 넘기면 된다. 결승선을 끊었을 때의 뿌듯함을
생각하라’며 힘을 낸다.”
⑧ 김여상(54, 사업, 167cm 62kg)= 최고 기록 3시간41분. 2002년 입문,
풀 코스 완주 29회. 낚시에 빠졌다가 친구 권유로 발길을 돌렸다. 사업상 술자리가
많은데 달리기를 하면서부터 몸이 좋아졌다. 일주일에 30∼40km 정도 훈련. 주말엔
북한산, 도봉산 산행으로 쌓인 피로를 씻는다. 틈틈이 짬을 내어 훈련할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깝다. 동아 마라톤 대회엔 페이스 메이커(4시간30분)로 참가한다.
“지난번에 어느 대회에서 페이스 메이커로 뛴 적이 있는데 봉사하는 보람이랄까
그런 만족감이 컸다. 난 완주도 좋지만 내 몸과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게 달리고 싶다.
여태까지 욕심을 안 내니까 다친 적이 없다.”
⑨ 노성임(45, 회사원, 158cm 49kg)= 최고 기록 3시간43분. 1999년 입문,
풀 코스 완주 70여 회. 목표는 3시간30분 이내 진입. 지난해 인천 강화도∼강원 강릉
308km를 무박 61시간 만에 횡단했고, 대구∼광주 215km는 32시간 걸려 주파했다.
서울 주위 9산 종주(아차산∼용마산∼망우산∼구룡산∼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를
24시간 만에 돌파하기도 했다.
“때론 몸이 안 따라 주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난 아직까지 다친 적이 없다. 몸의 소리를 잘 들으면 된다. 올핸 울트라
100km 한국 대표에 한번 뽑히고 싶다.”
⑩ 권영동(46, 회사원, 175cm 65kg)= 최고 기록 2시간56분16초. 1997년
입문, 풀 코스 완주 70여 회. 잠실 석촌호수 탄천에서 일주일에 70∼80km 훈련. 목표는
서브스리로 명예의 전당 입성. 불수사도북 서울 5산 종주 9시간12분 주파. 부산울트라
100km 10시간42분 완주. 부인도 마라톤동호회에서 만났다. 일이 바빠 연습을 충분히
못하는 게 맘에 걸린다.
“꼭 서브스리를 해서 딸에게 선물로 주고 싶지만 무리하면 안 된다. 난 ‘젠(zen,
禪 선)’ 마라톤을 꿈꾼다. 명상하면서 달리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우선
즐기면서 달리는 ‘펀 런(Fun run)’이 중요하다.”
⑪ 정경우(46, 회사원, 172cm 68kg)= 최고 기록 2시간53분32초. 2001년
입문, 풀 코스 완주 108회(서브스리 4회). 첫 완주 기록이 3시간44분. 훈련 거리
일주일 100km. 고구려클럽 회원들과 남산 등에서 훈련하고, 개인적으로 매일 새벽
서오릉이나 한강 둔치에서 15∼20km를 뛴다. 목표는 2시간 52분대. 2006년 강화도∼강릉
횡단마라톤 308km 대회에서 5위(49시간)를 차지했다. 울트라마라톤 24회 출전.
“지난해는 풀코스 100회 완주에 신경 썼다면, 올해는 기록을 당기고 싶다. 지난해
도중에 포기한 부산 태종대∼임진각 537km 종단도 완주하고 싶다. 언젠가 2시간40분대
진입이 꿈이다. 2시간50분대는 노력으로 되지만 2시간40분대는 노력은 물론 타고나야
된다.”
●교통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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