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대진∼강구 포구 걷기
‘바다, 나는 결국 네게로 왔다. 너는 갖가지 모습으로
나를 손짓하고 수많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 바닷가에 오랫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거센 해풍은 끊임없이 파도를 휘몰아 바닷가의 바위를 때리고 사장을
할퀴었다. 허옇게 피어 오르는 물보라와 깜깜한 하늘 끝에서 실려 온 눈송이가 무슨
안개처럼 나를 휩쌌다. …광란하던 그 바다, 어둡게 맞닿은 하늘, 외롭게 날리던
갈매기, 사위어가던 그 구성진 울음, 그리고 그 속에서 문득 초라하고 왜소해지던
내 존재여, 의식이여.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이문열의 소설 ‘그해 겨울’(젊은 날의 초상 3부)에서
대게에 한눈팔고, 파도에 넋 잃고
사는 게 팍팍하다. 고단하고 외롭다. 춥다. 하지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때론 미치도록 가슴 시리고, 때론 울고 싶으니까 사람 아닌가?
소설 ‘그해 겨울’의 주인공 영훈은 스물한 살의 대학생이다. 그는 밑도 끝도
없는 절망감과 세상살이의 부질없음에 진절머리를 친다. 까닭 모를 허무감에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한다. 결국 그는 죽기 위하여 그 해 겨울 동해 바다를 향해서 떠난다.
가방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의 유서와 약병이 들어있다. 바다까지는
이백여 리 사흘 길. 삼십 년 만의 폭설도 그에겐 관심 밖이었다.
그는 마침내 눈이 두 자가 넘게 쌓인 창수령을 넘는다. 손에 들고 다니던 가방은
새끼로 묶어 등짐을 지었다. 다리에는 고무줄로 감발을 쳤다. 그는 고갯길을 걷는
동안 내내 꿈을 꾸는 듯했다. 그 황홀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에 숨이 멎는다.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죽음의 유혹을 잊는다.
‘창수령(蒼水嶺), 해발 칠백 미터.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오,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창수령은 첩첩산골인 경북 영양군 무창리와 동해안의 영덕군 창수리를 잇는 낙동정맥
고갯마루다. 이곳 사람들은 ‘자래목이재’라고도 부른다. 거리는 3.5km 정도. 지금은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덮여 승용차로 순식간에 휘익 지나칠 수 있다. 고개 넘어 20분이면
곧바로 영덕군 영해면 대진해수욕장에 닿는다.
소설엔 사람을 죽이러 대진 바다에 가는 사람도 나온다. 칼갈이 중년 사내. 그는
19년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자신과 동료를 밀고한 배반자를 죽이기 위해 칼을 갈며
가고 있었다. 주인공 영훈은 그와 고개 아래 주막집에서 마주쳤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영훈이 허기와 추위로 눈밭을 헤맬 때 그 사나이는 영훈을
구해준 뒤 말한다. “어쩌면 거기서(대진) 자네와 나는 정반대의 일을 할 것 같군.”
창수령에서 낙동정맥 잔등을 타고 1시간 30분 정도(4km) 남쪽으로 걸으면 울치재가
나온다. 울치재(서읍령, 西泣嶺, 해발 527m)도 내륙 산간인 경북 영양(양구리)과
동해안 경북 영덕(창수리)을 잇는 고갯길이다.
조선시대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이 넘던 길이다. 영해∼영양∼안동∼문경새재를
통해 한양에 이르렀다. 영해도호부가 있을 땐 한양에서 내려오는 관리들도 이 고개를
밟으며 부임했다.
소설 속의 창수령 분위기를 느끼려면 요즘엔 울치재를 넘어야 한다. 2.8km 비포장
길로 호젓하고 아름답다. 눈 오는 날이라면 더욱 안성맞춤이다. 굽이마다 마른 나뭇잎이
켜켜로 쌓여 있다. 그늘엔 잔설이 숫눈으로 덮여 있다.
소설 속의 ‘눈 덮인 봉우리의 장려함, 푸르스름하게 그림자 진 골짜기의 신비,
쌓인 눈으로 가지가 찢긴 적송의 처절한 아름다움, 참나무 줄기의 억세고 당당한
모습, 떡갈 등걸을 검은 망사 가리개처럼 덮고 있던 계곡의 칡넝쿨, 다래 넝쿨’을
볼 수 있다.
강구∼고래불해수욕장, 최고의 걷기 코스
대진해수욕장은
덕천해수욕장, 고래불해수욕장과 죽 이어져 있다. 세 곳을 합하면 백사장 길이가
약 5km나 된다. 포구 앞 모래밭마다 이름을 붙이다 보니 같은 해안인데도 해수욕장이
나뉜 것처럼 됐다.
겨울 백사장은 막막하다. 마른 나뭇가지가 밀려와 쌓여 있다. 바람꽃이 활짝 피었다.
라면봉지 스티로폼도 날린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스며든다. 모래사장엔 드문드문
젊은 연인들이 걷고 있다. 누군가 모래밭에 ‘사랑, 젊음, 방황’이라고 끼적거려
놓았다. ‘수진아 사랑해’ ‘사는 게 막막해’ ‘시간, 바다, 세월’ ‘박철호 왔다
간다’ 이런 구절들도 보인다.
회색 갈매기들은 끼룩∼끼룩∼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오르내린다. 파도가 부풀어
오르면 갈매기들도 까르르 웃으며 딱 그만큼 날아오른다. 파도와 온종일 고무줄놀이를
한다. 저 멀리 고깃배들도 출렁인다. 언뜻 바다와 맞닿은 하늘의 구름 떼가 울렁인다.
파도는 일렬횡대로 몰려온다. 1차는 낮은 포복으로, 2차는 찔러 총 자세로, 3차는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달려온다. 4차 파도는 아예 검은 탱크처럼 으르렁거리며
밀려온다. 바다는 해안으로부터 멀리 갈수록 고등어 등처럼 짙푸르다.
요즘 경북 영덕 동해안 길은 온통 대게 천지다. 살이 통통하고 큰 것은 1마리에
1만 원, 작은 것은 5마리에 1만 원 정도다. 올해는 오랜 가뭄으로 대게가 예년만큼
실하지 못하다. 어부들은 설 전후쯤 되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싼 맛에
작은 것을 고르면 살이 적어 후회한다.
강구는 은어로 이름난 오십천과 동해가 만나는 포구다. 맞은편 삼사리엔 해상공원도
있다. 강구는 고깃배와 횟집으로 가득하다. 광어, 우럭뿐 아니라 요즘 잡히는 밀치,
게르치(놀래미 종류) 회도 맛볼 수 있다. 아침 해장으로 못생긴 곰치국도 시원하다.
가격은 어느 집이나 큰 차이 없다.
강구에서 병곡의 고래불해수욕장까지는 걷기에 으뜸이다. 국가 지원 도로(국지도)
20호선을 따라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도, 갈매기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오징어
말리는 것을 볼 수 있고 바다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약 40km 거리. 아침 일찍
나서면 하루에 마칠 수 있다. 저 멀리 검은 갯바위에는 낚시꾼들이 바다에 코를 박고
있다.
병곡면에서 울진군 후포면까지 약 10km 구간은 국도 7호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동해안 길은 이런 식이다. 군데군데 7호선과 국지도가 만났다가 갈라진다.
국도 7호선은 강원 고성까지 이어지는 동해안 길이다. 하지만 걷기엔 아무래도
위험하다. 해안가와 멀리 떨어진 곳이 많다. 가드레일에 막혀 바다와 숨바꼭질 하듯
언뜻언뜻 봐야 한다. 어부들의 정겨운 사투리를 듣기도 쉽지 않다.
경정리엔 창포말 등대와 풍력발전 단지가 있다. 창포 해안엔 아낙네들이 청어
과메기 말리기에 한창이다. 바닷바람에 꾸덕꾸덕하게 말리기 위해 청어 배 속을 따내기에
바쁘다. 한 줄 20마리에 1만 원(택배는 착불. 부성수산 054-732-8798). 갈매기 떼가
버린 청어 속을 먹느라 왁자지껄하다. 청어 알은 부침개나 김치찌개로 먹거나 젓갈을
담근다.
절망은 끝이 아니라 다른 희망의 시작임을
소설 주인공 영훈과 칼갈이 사내는 대진 바다에서 또 마주친다. 영훈은 자살에
실패한다. 아니 오히려 그의 근육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바닷물에서 모래밭으로
끌어냈다. 그는 깨닫는다.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고 구원이라는
것을.
진실로 예술적인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 위에 기초한다고. 그는
유서와 약병을 힘껏 바다로 던져버린다. 그것들은 이내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사내는 “뭘 던졌나?” 하고 묻는다. 영훈은 대답한다. “감상과 허영을요. 익기도
전에 병든 내 지식을요.”
칼갈이 사내도 배반자를 죽이려 갈고 갈았던 시퍼런 칼을 바다를 향해 힘껏 던져
버린다. 칼은 순식간에 바닷물 속으로 잠겨버렸다. 그는 말한다. “내 오랜 망집(妄執)을
던졌다. 놈은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죽어가는 아내와 부스럼투성이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그대로 살려두는 쪽이―더 효과적인 처형이었지….”
갈대포구에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해가 뜨면 바다는 은물결에 눈이 부시다. 눈자위가
간지럽다. 눈동자가 출렁인다. 저 멀리 새벽 고깃배가 돌아온다.
아침 해는 쉽게 바다에서 곧바로 두둥실 떠오르지 않는다. 주민들도 벼르고 별러서야
한 달에 두세 번 해돋이를 볼 수 있다. 수평선은 늘 검은 구름으로 뭉개져 있다.
안개로 아슴아슴 버무려져 있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경계는 모호하다.
해는 보통 검은 구름밭 아래쪽이 붉게 타오르며 솟는다. 마치 들판에서 짚불이
타오르는 것 같다. 그렇다. 아무리 검은 구름 짚불을 태우며 솟아오르는 해이지만
결코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일단 떠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말갛다. 인간
한 세상도 그렇다. 살아 있다는 것은 늘 아름답다. 살려고 꿈틀거리는 모든 생명은
눈부시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