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황실의 질투-집착-배신 ‘쌍화점’

차가운 ‘서리꽃’에 담긴 비극적 파국

고려 황실의 질투-집착-배신 ‘쌍화점’

14세기 원나라의 정치적 압박 속에서 고립된 고려의 왕(주진모 분). 그가 유일하게

믿고 사랑하는 호위무사 홍림(조인성 분). 그리고 원나라 출신 왕비(송지효 분).

왕의 동성애 파트너 홍림은 왕비에게 연정을 느껴 수시로 통정을 하고, 이를 눈치

챈 왕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갈등을 활용해 합법적인 왕권 교체를

주도해 나가는 승기(심지호 분).

공민왕이라는 역사적 실존 인물에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시켜, 애욕의 감정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다룬 영화가 ‘쌍화점’이다.

영화

초반,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복면 쓴 무사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공민왕의 친위 부대

건룡위 요원들의 칼 싸움 장면. 살점이 도륙되고 선혈이 낭자한 ‘서걱서걱한’ 장면은

관객을 극에 빠져들게 유도한다.

야사에 기록된 공민왕의 최후는 이렇다.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9월 22일 밤. 공민왕은 술에 취해 침전에서 잠이 든다.

내시 최만생과 총애를 받던 신하 홍륜은 무리를 이끌고 들어가 칼을 휘두른다.

만취해 있던 공민왕은 단 한번 저항도 못해보고 시해 당한다. 역사서는 그 날

밤 현장을 묘사하면서 ‘왕의 뇌수가 벽에 뿌려졌다’고 기술했다.

한편 역모가 발생하기 1년 전인 1373년(고려 공민왕 22년) 10월, 공민왕은 미소년

동성애 집단인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한다.

대언(代言: 조선의 승지에 해당하는 벼슬로 오늘날의 청와대 수석에 해당) 김흥경이

총책임자로 내정됐고 홍륜,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이 왕의 침실을 들락거린다.

고려사에 ‘공민왕은 성질이 여색(女色)을 즐기지 않았고 또 관계도 되지 않았으므로

죽은 공주(공민왕이 사랑한 노국공주)의 생시에도 가까이 하는 일은 심히 드물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공민왕은 왜 자제위를 만든 것일까?

고려사는

‘공주가 죽은 뒤 여러 왕비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별궁에 두고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고 당위성을 설명한다.

고려사는 공민왕을 관음증 환자이자 동성애자로 언급하고 있다.

공민왕은 여자 모양의 화장을 하고서 여종을 불러들여 김흥경, 홍륜 등으로 하여금

‘난잡한 행동’을 하게 하고 자신은 옆에서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러다 ‘마음이 동하면 홍륜 등을 침실로 불러 들여서 남남끼리 음행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자제위 중에서도 홍륜은 왕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공민왕이 홍륜,

한안, 김흥경 등에게 왕비들과의 통정을 강요하자, 익비는 자제위 멤버들과 관계를

가졌고, 그 중 홍륜은 ‘왕명을 빙자해’ 자주 익비를 찾았다.

그 익비는 마침내 임신을 한다. 시해가 발생하기 직전인 9월 21일.

측간(변소)에 가는 공민왕을 따라온 내시 최만생. 그는 공민왕이 바라는 소식을

전한다. “익비(益妃)께서 아기를 밴 지가 벌써 5개월이 되었습니다.”

익비는

고려 현종의 아들인 평양공 왕기(王基)의 13대손 덕풍궁 왕의(王義)의 딸이었다.

최만생의 말을 들은 공민왕은 “누구와 관계했느냐?”고 묻고 그 대상이 홍륜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에 공민왕은 “내일 홍륜의 무리인 자제위 무리들을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이어 최만생에게도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아라”고 말한다.

죽음의 공포에 떨던 최만생은 왕의 극비 계획을 홍륜을 비롯한 자제위 멤버들에게

제보한다. 호위무사들보다 더 가까이 왕을 모셨던 이들은 마침내 만취한 공민왕을

시해했다는 것이 역사에 기록된 공민왕의 최후 정황이다.

‘쌍화점’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동성애자 공민왕이 친위부대 수장인

홍림을 성적 파트너로 친애하다가, 원나라에서 온 왕후와 자신 사이에 후사가 없자

홍림에게 왕후와의 동침을 명한다고 드라마를 설정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주진모와 아도니스를 연상시키는 조인성

이후 왕후와 홍림이 금지된 사랑에 빠지자 마침내 왕은 홍림의 배신에 대해 죽음을

담보로 한 결투를 벌이게 된다는 스토리가 펼쳐진다.

공민왕과

홍림이 침소에서 벌이는 적나라한 동성애 애정 표현과 홍림과 왕비 사이에 전개되는

4, 5차례의 올 누드 정사신은 파국을 예고하는 공민왕의 행적을 역설적이게 표현한

물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공민왕과 홍림이 말을 타고 거문고 연주를 하면서 애정을 쌓아가는 장면, 그리고

홍림이 병서가 쌓인 서고에서 왕비와 벌이는 불륜 행각을 눈치챈 왕이 배신감에 치를

떠는 장면 등은 기행적인 최고 통치권자의 파국적 말로를 상징한다.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괴한들을 응징하는 자제위 대원들의 모습, 그리고 애정에서

증오 관계로 바뀌는 홍림과 공민왕이 결국 파멸로 달려가는 장면들은 유하 감독의

전작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에서 싸움꾼 고등학생들, 이권을 위해

살인도 마다않는 조직폭력배들의 마초(macho)적인 다툼이 시대를 옮겨서 펼쳐지는

양상이다.

왕의 심복이자 동성애 파트너인 홍림을 처음에는 단순히 육체적 관계로 대상으로

생각했지만 점점 더 정신적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왕비의 처연한 관계가 복잡하게

실타래를 만들어 가는 133분은 실존 공민왕의 비극을 현대 관객들이 ‘훔쳐보기’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2008년 12월 30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추신

1.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권상우 분)처럼, ‘쌍화점’의 홍림도 혼란스러운

청춘의 표상이다. 자신이 뭐 하는지도 모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청춘이며,

그러다 지나간 청춘을 후회한다. - 유하 감독의 인물 설정론 중.

2. ‘꽃미남 부대’ 건룡위 요원 36명의 집단 폭포 목욕신은 여성 관객을 위한

팬 서비스.

3. 극 중 조인성은 왕(주진모 분)과 동성애를 한 번, 왕후(송지효 분)와 정사를

다섯 번 치른다.

4. “‘쌍화점’은 액션 대작 또는 궁중 음모와 배신이 담긴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농밀한 멜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본질적이고 내밀한 사랑을 담은 러브 스토리다.”

- 유하 감독.

5. ‘쌍화점’의 한자 제목은 ‘상화점(霜花店)’이다. 조선 초기 ‘남녀상열지사’라는

비판과 함께 역사 속으로 강제 추방된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의 한자에 쌍(雙)

대신 서리 상(霜)을 넣어 제목을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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