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따스한 영화 ‘순정만화’
미소를 머금게 하는 아날로그 로맨스극
'순수한 감정 또는 애정'.
국어 사전에서 정의한 순정(純情)의 의미다.
<바람의 화원>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는 문근영이 순박한 연변 처녀로 출연해
춤을 통해 인생의 애환을 체험하게 된다는 <댄서의 순정>에서 이미 '순정'의
의미를 일깨워 준 바 있다.
국내 영화가에서도 '순정'은 단골로 활용되고 있는 로맨스극의 제목이다.
2001년 KBS에서 이 타이틀을 걸고 드라마가 방영됐고 황미애의 만화, 글재주꾼
성석제의 소설 제목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순정’은 대화를 삽입 시켜 코믹하게 그린 그림이라는 뜻의 ‘만화’와 결합돼
<순정만화>로 공개될 예정이다.
이미 인터넷에서 공개돼 뜨거운 조회수를 기록했다는데 사실 본인은 이 만화에
클릭한 적이 없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아웃사이더이다.
원작을 미리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보게된 <순정만화>는 그래서 더욱 첫사랑의
연인의 체취처럼 은은한 향을 느꼈다.
모처럼 한국 영화에서 만나는 풋풋함이 듬뿍 담겨 있는 영화다.
유지태는 보기만 해도 기분을 고양(高揚) 시키는 배우다.
훤칠한 키와 지리산 청정수 같은 맑은 미소가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다.
한류 열풍을 몰고왔다는 어느 탤런트의 웃음은 왠지 인공 감미료를 듬뿍 쏟아
놓은 미역국을 먹는 것 같은 느끼함이 있지만 유지태의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100% 빨아 들이도록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동사무소 직원 연우(유지태)는 출근 길에서 아파트 아래층에 살고 있는 여고생(이연희)과
조우를 하게 된다.
‘그럼 18살?, 우리 동갑이네요. 띠동갑!’.
동네에서 마음씨 좋은 노총각으로 각인된 연우와 여고생의 풋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말을 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눈치만 살피다가 보낸 한평생!’.
70년대 송창식의 노래 구절이다.
수줍어서 아니면 퇴짜를 맞을까봐 사랑하는 감정을 묵히고 가슴 졸이면서 표현을
하지 못했던 아날로그 세대의 감성을 연우가 유효적절히 표현해 내고 있다.
이명세
감독의 미스테리 로맨스극 <M>에서 강동원의 가슴에 파고(波高)를 일으켰던
히로인 이연희는 이번 영화에서도 예의 깔끔한 외모와 행동거지로 뭇사내들의 감정을
흔들어 놓을 것 같다.
두 사람의 로맨스의 위기는 여고생 엄마 나영희로부터 날아온다.
‘연우씨는 다른 여자를 소개 시켜주고 싶은 정도로 멋진 총각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누구인지 모를 근본없는 집안 남자와 우리 딸이 사귀는 것은 원치 않아요!’라며
노골적인 결별을 요구한다.
하지만 딸과 연우의 진솔한 관계는 까탈스런 어머니의 양해로 대동강 얼음이 춘분을
맞아 녹듯 해빙이 된다.
‘우리 동네 사람들 없는 데까지 손잡고 걸어가요!’.
30살 총각 연우에게 순정을 다하고 있는 여고생의 행동은 ‘활화산 같은 폭발적인
성적 장면이 없어도 오감을 자극 시켜 줄 수 있다는 본보기를 제공하고 있다.
사골 국물 같은 서서히 우려 나오는 두사람의 로맨스에 크로싱 매치가 되는 것은
천방지축 동사무소 공익 요원 강숙(강인)과 헤어진 남자의 흔적을 지우지 못해 가슴앓이하고
있는 하경(채정안)의 사연이다.
막차를 기다리는 텅 빈 지하철 역 구내.
22살 강숙(강인)은 방금 스쳐 지나간 긴 머리의 하경(채정안)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어딘지 외모에서 슬픔이 배어 있는 뒷모습을 보며 ‘말을 걸어? 말어?’ 망설이는
강숙.
막차가 떠나려고 하지만 그녀는 탈 기색이 없다.
강숙은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지하철에 태운다.
‘난
스물 아홉. 너는?’
‘스물 두… 다섯인데요! 저는...’
‘그냥 말 놔!’
이렇게 해서 차분한 연우의 사랑에 강숙의 돌출적 로맨스가 대비돼 청춘 남녀의
사랑 풍속도가 전개된다.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을 거부했던 하경도 결국 강숙의 진심을 받아 들이면서 극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라스트 무렵 강숙과 하경의 입맞춤 장면이 보여지지만 그 흔한 자극적인 장면
없이 전개되는 다소 밋밋한 드라마다.
하지만 한가로운 동네 풍경과 가을빛 햇살을 듬뿍 받아낸 것 같은 오소독스한
분위기의 깔끔한 화면이 113분 동안 펼쳐지는 화면에 몰입하게 만드는 필수 요소가
되고 있다.
‘올 겨울도 혼자 보낼 건가요?’.
메인 광고 카피다!
뜨거움을
감춘 채 밖으로 김을 모락모락 풍기는 모카 커피 향 같은 <순정만화>.
기계적이고 찰나적인 디지털 세대의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됐던 젊은이들에게 다소
거칠지만 인간의 심성을 울려 주는 아날로그 사랑의 가치도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시사장을 나오는데 상큼한 풀 냄새가 등 뒤로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2세 이상 관람가, 11월 27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