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 법, 실효 없다?
‘왜?, 인터넷을 통해 나를 사채업자로 몰아가느냐!’는 하소연을 토로했던 탤런트, 영화배우 겸 CF 모델 최진실은 오직 하나 뿐인 생명을 버리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했다.
사후(死後) 제기되는 온갖 추측과 소문은 이제 <엑스 파일>의 광고 문구처럼 ‘진실은 저 편 너머’로 사라져 갔다.
사법 당국에서는 ‘최진실 법을 통해 악질적이고 상습적인 악플러를 사법 처리하겠다’고 뒷북을 쳤지만 결국 포기선언을 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온갖 저주의 악담을 받고 이미 목숨을 버렸던 이전 연예인들의 죽음은 무슨 죽음인가? ‘역시 큰 것 한방이어야 사법 당국도 움찔하는가?’
본인도 2003년 한 신문의 문화 섹션에 ‘영화 속 옥의 티’라는 6매짜리 에세이를 6개월 쓰는 동안 누적 인원 1,000여명으로부터 온갖 인신공격을 당해 보았다.
편하게 홍보성 칼럼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겪은 일이었다. 그때 필자는 영화판에서 떠도는 눈 먼 촌지(寸志)와 향응(饗應)을 꼬장꼬장 거절하고 오직 이름 석 자로 승부를 걸겠다고 나선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깨달았다.
그건 그렇고 어떤 처벌 규정을 내세우든 이미 최진실 법은 실효 가치가 없는 법이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를 제 2의 사이버 테러를 각오하고 몇 가지만 제기한다.
첫째. 사이버에는 게이트 키핑이 없다
신문사 밥을 먹은 기자 초년병들은 수습 때부터 선배 기자나 데스크로부터 기사 교정, 검열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교열부의 퇴고를 거쳐 지면에 게재돼 독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거친다. 기자 초교(初校)를 몇 단계 거쳐 오류를 잡아내는 과정이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다.
컴퓨터 모니터를 열고 키보드를 두드리면 그것이 바로 여론이 되는 디지털 세상에서 누가 ‘게이트키핑’을 할 것인가?
언론사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특정한 이슈가 발생했을 때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우기 보다는 편리하게도 ‘네티즌들의 의하면…’이라는 수식어로 사이버 공간을 헤집고 다니는 이들의 무책임을 부추겨 왔다.
톱 탤런트의 죽음으로 잠시 동안 두더지들은 어둠의 공감에서 잠시 눈알을 부라리며 밖의 공기를 살피겠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둘째. 밴드 왜건(band wagon)의 속성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있을 때 본인은 40,000매짜리 영화백과사전을 마무리 하느라 솔직히 남한 출전 시합을 온전히 본적이 거의 없는 매국노(?)였다.
8강에 진출했을 때 고시원 밖을 흔드는 함성에 놀라 밖으로 나와 보니 길 가던 생면부지의 아줌마가 내 손을 붙잡고 운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8강에 진출했어요! 이제 우승만 남았어요!’
1930년 남미 우루과이, 1962년 칠레, 1978년 아르헨티나, 1986년 멕시코가 월드컵을 개최했다. 이들 나라가 남한 보다 잘사는가? 물론 이태리, 스위스, 서독, 프랑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도 개최했지만.
시골 장터에 배뱅이 굿판이 벌어지거나 소독용차가 움직이면 벌떼처럼 달려드는 인간의 속성을 활용한 마케팅 용어가 바로 ‘밴드 왜건 Band Wagon’이다.
'공격 앞으로! 라고 한 사람이 외치면 무작정 달려가는 심리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밴드 왜건 심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MBC가 자의적인 의도를 갖고 미친 소 파동을 일으켰을 때 ‘초등학교부터 여고생 심지어 애 낳은 20대 아줌마까지 광화문으로 몰려들어 ’나는 더 살고 싶다!‘며 앞 뒤 가리지 않고 아우성치는 그 광경을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사이버에서 ‘누가 어쨌더라!’라는 카더라 통신이 뜨면 눈알에 벌게지도록 퍼다 나르는 ‘막무가내 근성’이 초등학생 2명을 홀연히 남기고 떠난 탤런트 자살 사건으로 개벽천지하듯 변할 것인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지!.
셋째. 자기 이름에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
대학 구내 음식점, 등산로 돌무덤, 세계 주요 관광 유적지, 시내버스 좌석 커버 심지어 화장실까지.
훈민정음 자손답게 우리는 빈 공간만 생기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고 ‘철수, 이곳에 다녀가다!’는 외치는 민족이다.
이름에 책임지는 인터넷 실명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관광지 안내판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과 핸드폰을 공개하면서 ‘사귈 여자 찾습니다!’ 혹은 ‘개봉동 살고 있는 000, 몇 월 몇 일’을 써놓고 가는 사회, 자신의 이름 석 자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사회에서 실명제는 절대 브레이크 장치가 될 수 없다.
넷째. 투서 투기, 그리고 우리
경찰서나 일선 법원으로 접수되는 투서가 1년 평균 60여만 건이다.
주 5일 근무로 치면 260여 일 동안 처리해야 하는 1일 투서 민원은 평균 2,310건이다.
‘폐하! 통촉하옵소서!, 판서 김 모가 어찌어찌 불충(不忠)을 자행하고 있나이다!’라는 말 한마디로 사약을 받아 하룻밤 사이 삼족이 떼죽음을 당하는 광경은 오늘도 사극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방영되고 있다.
‘모친을 남에게 소개할 때’ 은연중 하는 말이 ‘우리 엄마입니다!’이다.
풋볼과 함께 미국에서 국기로 대접 받고 있는 야구장에서 나한테 날아오는 공을 잡기 위해 외야수가 외치는 신호는 ‘My Ball!이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현재 한국인들은 ‘우리’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튀려는 이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CF 정수기 장면. ‘우리 집은 얼음 나오는 정수기가 있다!’라고 어린 남자 애가 자랑한다.
이에 옆에 있던 또래 여자 애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엄마 우리 집은?’이다.
3류 대학 나온 옆집 순돌이 아빠가 ‘임페리얼’을 모는데 2류 대학 나온 당신은 뭐하는 것이냐라고 마누라가 타박하면 카드빚을 내서 내일부터 ‘에쿠스’를 몰아야 직성이 풀린다.
‘글세, 돈이 얼마나 많은지 바지 사장을 내세워 사채놀이를 했다자나!’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남이 잘살고 잘 먹는 것에 대해 참지 못해 ‘우리로 들어오게 하거나 나 자신이 우리 안으로 악착같이 들어갈려는 심성’이 한국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다섯째. 전문가들을 죽이는 자칭 전문가들
본인이 영화 전문 기자 20여년을 한 것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스크린 쿼터, 할리우드 침공 문제가 제기 됐을 때 방송국 시사 프로그램에 전문가를 자처하면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주역들은 이름도 생소한 NGO 단체 자칭 대표나 급조한 ‘한국 영화 열렬히 사랑하기’ 인터넷 카페 회원 그리고 구색 맞추기로 국회의원과 공허한 이론만 앞세우는 교수직함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미친 소 파동 때 각 방송국 토론 프로그램을 점령해 논객을 자처한 이들은 철학을 전공했다는 대학 시간 강사와 국회의원,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다.
농림식품수산부나 일선 축산업계에서 광우병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오고 있는 수많은 전문 인력들은 ‘테러와 인신공격’을 우려해 그저 TV 모니터에서 팝콘을 삼키는 ‘카우치 족’을 자처했다. 애국 시민으로 포장된 철저한 비전문가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전문가들을 자처하면서 선무당처럼 칼을 휘젓는 것도 인터넷 세상이 만든 또 하나의 세상 풍속도이다.
“경찰은 최근 인터넷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와 악플(악성 댓글)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악질적․상습적 `악플러'를 구속 수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집중단속에 착수키로 했다. 단속 대상은 ▲개인이나 단체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악성댓글을 게시하는 행위 ▲인터넷 게시판, 전자우편,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한 협박행위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사이버 스토킹 행위 등이다. 경찰은 허위사실 유포 여부와 파급 효과, 피해 내역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상습적이고 악질적으로 판단되는 피의자의 경우 끝까지 추적, 검거해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등 엄벌할 방침이다“. - 연합 뉴스 10월 5일자
가진 자들에게 대한 원초적인 반감과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무한대의 질투와 시기심을 드러내고 있는 민속 근성의 한풀이를 어떤 제한도 없이 원 없이 풀어 버릴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해온 것이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이다.
앞서 인용한 통신 기사문처럼 복날 개 때려잡듯 기간을 정해 악플러를 소탕하겠다고 나서는 법 집행 당국의 행동은 잠시 문제를 유보 시키는 반짝 조치 밖에는 될 수 없다.
최진실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은 25세 증권회사 여직원이라고 한다.
순리대로라면 머지않아 아이를 키울 예비 엄마다.
악플러의 원산지로 알려진 초등학생부터 나라 미래를 이끌 아이를 잉태할 여성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무한대의 거친 심성을 퍼붓고 있는 오염된 사이버 바다에 어망 하나 던져 사지가 뒤틀린 고기를 몇 마리 잡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책은? 이미 인터넷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진 지 오래됐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서두에 '최진실 법이 실효가 없다'고 강짜를 놓았지만 누군가가 머릴 짜내 만들어 낼 것이라는 '최진실법'이 그나마 작은 울타리를 쳐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울타리 속 빈자리에 상식과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되돌아와 서로 따뜻한 목소리를 나누기를 꿈꾸는 것은 그저 소박한 희망일 따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