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 술집 시인통신이야기1



‘후퉁(胡同)은 몽골어의 우물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말로, 골목이란 뜻을 갖고 있다. 북경의 후퉁은 큰 것만 따져도 삼천 곳이 넘고, 작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북경의 어느 곳에서나 후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력거꾼들이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항시 대기하고 있는 관광후퉁을 제외하더라도, 자금성을 둘러싼 골목들은 사실 어느 곳에나 볼 만한 것들이 있다.……후퉁은 막다른 길 없이 다시 또 다른 후퉁으로 이어지고, 후퉁의 수많은 대문 중의 하나를 열면 그 안은 다시 또 골목으로 이어진다. 어느 이름 없는 창에는 새 조롱이 놓여 있고, 오래되어 낡은 마오 주석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창 아래에서는 길거리 이발사가 그 골목에 사는 누군가의 머리를 자르고 있다. 여름이라면 배를 드러낸 남자들이 그 골목에 있을 것이고, 겨울이라면 양꼬치를 들고 뛰어가는 아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인숙의 북경 이야기 ‘제국의 뒷길을 걷다’에서>

1780년 음력 칠월 여드레.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사방이 탁 트인 중국 요동벌판에 들어서면서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아,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그 유명한 호곡장론(好哭場論)이다. 연암은 말한다. 사람들은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라, 기쁨이 넘쳐도 울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고, 즐거움과 사랑이 터질 것 같아도 울고, 욕심이 가득 차도 울게 된다고. 즉 원인이 무엇이든 가슴이 꽉 막힐 땐 소리 내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는 것이다.

1200리나 아득하게 펼쳐진 요동벌판.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한 대평야. 연암은 비로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통쾌한 마음이 절로 들어 몇 번이나 무릎을 쳤다.

손바닥만한 조선 땅. ‘서로 나 잘났다’ 핏대 올리며 싸우는 좀팽이 선비들. 중국 변방의 토성쯤밖에 안 되는 땅에서 살면서,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업신여기는 턱없는 허세, 한 줌도 못되는 상투를 갖고 세상에 잘난 척은 다하는 거드름.

연암은 “갓난아기가 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우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그것은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두려워서도 아니다. 삶의 고행을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아기가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보고 발도 펴보니, 참으로 가슴이 시원해서 나온 우레 같은 것’이다.”

그때 답답해도, 울 만한 곳이 없었다

80년대 대한민국 서울. 연암이 살던 때나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정권 시절. 겨울공화국. 숨이 턱턱 막히고 먹구름이 낮게 드리웠다. 자궁이 답답하고, 불알 밑이 뻐근했다. 장안의 논객 호걸들은 어디 울 만한 곳이 없었다. 모두 애꿎은 술만 퍼댔다.

만나면 우리
왜 술만 마시며
저를 썩히는가.
저질러 버리는가.

좋은 계절에도
변함없는 사랑에도
안으로 문 닫는
가슴이 되고 말았는가.

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들 외로움만 쥐어뜯는가.
감싸주어도 좋을 상처.
더 피 흘리게 하는가.

쌓인 노여움들
요란한 소리들
거듭 뭉치어
밖으로 밖으로 넘치지도 못한 채…

<이성부 ‘만날 때마다’ 전문>

하지만 울 만한 곳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인통신’이 있었다. 시인통신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옆쪽 피맛길 한 모퉁이에 있었다. 정확한 주소는 서울 종로구 청진동 300번지(현재 ‘소문난 집’ 자리). 탁자 두 개에 의자 예닐곱 개가 전부였다. 빙 둘러 빽빽이 앉으면 12명이나 앉을까. 그곳에 장안의 시인묵객 소설가 문학평론가 화가 신문쟁이 영화감독 연극쟁이 철학자 사진쟁이 산악인 작곡가 전위예술가 노동운동가 사주쟁이 출판인 자유기고가 정치지망생 애국지사 어중이떠중이 온갖 잡것들이 밤마다 모여 “전두환 노태우 씨×놈”을 내뱉고,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논하고, 개똥철학과 구라들을 풀어댔다.

알전구만 뎅그렁 달린 옴팡집 2평

시인통신은 해방구였다. 그곳은 술집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카페라고 하기에도 뭐한 묘한 곳이었다. 차라리 목로주점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옴팡집이라고나 할까. ‘문화 복덕방’이요, ‘사람 복덕방’이었다. 촉수 낮은 알전구만 뎅그렁하게 매달린 2평짜리 공간. 술꾼들의 낙서들이 사방벽면 천정 탁자 위까지 가득했다. 그 중엔 명화 뺨칠 만한 그림이나 멋들어진 붓글씨도 보였다.

’아이들은 데모하고, 어른들은 술 처먹고, 누나는 화장하고, 선거하는 놈들은 좆 나게 바쁘다‘
‘有酒有樂 無酒無樂(유전유락 무전무락)’
‘죽었으면 죽었지 지금은 죽을 수 없다’
‘목숨 바치세요. 술 마시려면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봅시다’
‘수많은 남자가 살고 갔지만, 당당한 대장부가 몇이나 될까?’
‘맥주는 길고 소주는 짧다’
‘허무 그 단단한 놈’
‘잘 사는 놈이 법을 지킬 때, 못 사는 놈은 기분이 좋다’
‘방관은 죄악이다’
‘깨어 있는 것은 입밖에 없나 보다’
‘하늘이 어두운 새벽, 사람들이 어둡게 살아가고 있다’
‘누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개수작했습니다. 누님은 여전히 누님이고 강물은 저렇게 흘러갑니다’

김재곤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툭하면 시통(이하 시인통신)에서 울었다. 눈물 콧물이 술잔에 뚝뚝 떨어지면, 그는 그 눈물 콧물이 섞인 술잔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닦지도 않은 그 술잔을 다시 가득 채워 선후배들에게 권했다.

“봄은 왔어도 봄 같지 않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하고, 국가는 그걸 총칼로 막고…. 이게 무슨 개 같은 역사냐? 왜 이 나라는 이런 슬픈 역사만 되풀이되는 것이냐?”

그는 ‘광주’이야기만 나오면 울었다. 그 자신 신문쟁이로서 무력감에 또 울었다. 그리고 ‘광주학살자를 처벌하라’며 분신한 그의 아우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의 아우는 서울대 경제학도였다. 그는 거리의 시위대를 보면 미칠 것 같다고 했다. 그 속에서 아우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에 피 같은 칼럼을 썼다. 그의 글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절절한 절규가 담겨 있었다. 그는 군사정권에 골칫거리요, 눈엣가시였다.

그는 늘 큼직한 책가방을 옆구리에 꽉 끼고 다녔다. 그 속엔 당시 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던 영어 원서가 가득했다. 그는 그 책들을 게걸스럽게 읽어댔다. 그의 집에도 방마다 책이 넘쳐났다. 그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선후배들에게 끊임없이 화두를 던졌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넌 그런 경우 어떻게 쓸 것인가?’

그는 김종철 김태홍 한겨레 논설위원과 자주 어울렸다. 그들도 김 위원이 울면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 당시 동아일보 후배였던 김지완 손석춘 기자도 그의 술친구였다.

가끔 당대의 논객 김중배 동아일보 논설위원도 자리를 같이했다. 술좌석에서 김중배 위원은 거의 말이 없었다. 작은 몸집에 까무잡잡한 얼굴. 외로운 눈빛에 약간 피곤한 표정. 늘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동료들의 말이 끝나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문학 예술 논하던 사랑방이 시초

시인통신은 원래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시인 겸 소설가 조해인, 시인 김선유 이도윤 이생진 이승철 임문혁 최정자, 추리작가 정건섭, 소설가 김우영, 문학통신 이지룡, 화가 김문조 박광호 서영준, 사진작가 김종구, 자유기고가 공정희, 교사 안철상, 문학청년 노광래 박경남, 해냄출판사 송영석, 출판인 이정한, 사업가 김명성, 방송인 김경원 등이 그 멤버였다. 가끔 천상병 시인이나 걸레스님 중광 그리고 소설가 이호철 이외수, 전위예술가 무세중도 얼굴을 비쳤다.

이들은 1982년 종로통에 연락사무소 ‘시통’을 만들어놓고, 틈만 나면 하나둘 모여 세상사는 이야기나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했다. 술이 생각나면 서로 주머니를 털어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맥주를 사다 마셨다. 안주는 인근 밥집에서 동그랑땡이나 생선구이 혹은 순대국을 시켜다 먹었다.

낮엔 누구든 커피 한두 잔 알아서 타 마시곤 바구니에 500원씩 넣으면 됐다. 그 돈은 시통 운영비로 썼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주인 역할을 했던 시인 박종수 씨가 그때그때 필요한 비용을 갹출해서 근근이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두 달이지, 해가 넘어가자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박 씨는 두 손을 들었다.

1984년 봄 한귀남(1944~) 씨가 우연히 시통에 들렀다가 엉겁결에 덜컥 운영을 맡게 됐다. 당시 한 씨는 빈주먹에 아이 셋이 딸린 나이 마흔의 이혼녀 신세. 박 씨는 “돈은 천천히 갚아도 되니 한번 해보라”고 했다. 한 씨는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세 어린 아들(17,15.12세)의 얼굴이 차례차례 눈에 어른거렸다. 우선 어린 새끼들부터 살리고 봐야 했다,

“난 부잣집 딸로 태어나 비교적 큰 고생 없이 살았었다. 그러다가 사업하던 남편이 쫄딱 망하고 이혼까지 하게 되자 절망과 분노에 어쩔 줄 몰랐다. 그때까지 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시통을 맡은 뒤 한동안 난 도저히 그곳을 드나드는 그 괴물 같은 술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툭하면 울부짖거나 욕설이요, 탁자가 엎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불쑥불쑥 던지는 알쏭달쏭한 해괴한 말들도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밥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들은 ‘나라와 민족 타령’에 밤을 지새웠다. 정말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도 가슴에 젖어왔다. 모두 ‘어린애 같은 어른들’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는 시통하면서 비로소 인생초등학교를 마쳤다고 볼 수 있다.”

“손님들은 하나같이 소탈하고 인간적이었다. 난 주인이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들이 오면 인근 구멍가게에서 맥주 몇 병과 마른안주를 사다가 놓아주곤, 병 숫자만 적어 놓으면 그만이었다. 가끔 라면을 끓여주거나, 계란말이 혹은 김치찌개를 해주면 어린애들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술값은 각각 호주머니에서 조금씩 갹출되어 내 앞에 놓여졌다. 난 그 중 한두 명 있게 마련인 빈털터리에게 교통비를 슬쩍 찔러주었다.”

아이들은 시통 바로 밑 2평 지하방에서 두더지처럼 살았다.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점점 말을 잃어갔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술병과 찻잔을 정신없이 날라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 동굴 같은 방에서 상머리에 앉아 묵묵히 공부했다. 고마웠다. 그걸 보면 다시 힘이 용솟음쳤다.

한 씨는 하루 3만~4만원 벌면 그 중 7000원은 옛 주인인 박 씨가 시통을 담보로 빌려 쓴 일숫돈을 날마다 7000원씩 갚아야 했다. 거기서 남은 돈 중 1000원으로 쌀을 사다가 먹고 살았다. 굶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고마웠다. 바쁠 땐 자리를 비워도 별 문제 없었다. 자기들이 알아서 돈을 놓고 가거나, 외상 땐 벽에다가 ‘아무개 맥주 몇 병 먹고 간다’고 써놓고 갔다. 그게 외상 장부인 셈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외상값을 갚고 나선, 그 벽 낙서를 쓱쓱 지워버렸다.

아이들은 그 습한 지하방에서 92년 이사 갈 때까지 8년을 살아야 했다. 한 씨는 지금도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어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한 것도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며 울먹인다.

무허가에 벌금… 그래도 멋과 흥 넘쳐

한 씨가 시통을 맡은 이듬해인 85년부터 손님들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초기 터줏대감들이 하나둘 이런 저런 사정으로 발길이 뜸해진 것이다. 대신 화가 서영준과 시인 김홍성을 필두로 서라벌예대 출신의 시인 소설가 화가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당시 술집들은 12시 이후엔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소위 심야영업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어기면 엄청난 벌금을 때렸다. 게다가 시통은 무허가라 한번 걸렸다하면 풍비박산 날 게 뻔했다.

하지만 시통은 무슨 똥배짱인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일찍 문을 닫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시통 술꾼들은 12시가 넘어도 전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되레 자정이 가까워지면 어디선가 2,3차를 끝내고 꾸역꾸역 자꾸만 모여들었다. 한 씨로선 애간장이 타고 환장할 일이었다.

그 와중에 박경용 시인은 대문 밖에서 “어이, 한 여사, 경용이가 왔소!”하며 고래고래 소리부터 지르기 일쑤였다. 천상기 일간스포츠기자는 들입다 철대문부터 걷어차고 들어왔다. 천하의 호걸 원강 스님이 그 뜨겁던 여름에도, 누더기 장삼 차림으로 “껄껄껄” 웃으며 들어서는 것은 정말 양반중의 으뜸양반이었다.

시인과 화가가 논쟁이 붙으면 그건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직관과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런지 이들은 조금도 지지 않으려 했다. 신문기자들은 이들의 논쟁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은 좀처럼 가슴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건 봐줄 만했다. 그 다음 ‘심야 불쇼’가 문제였다. 소설가 최성각의 ‘봄비’가 울려 퍼지면서 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최성각은 그의 선배 표성흠과 시통 단골식구였다. “봄비를 맞으며 길을 걸으며, 외로운 거리의 비를 맞으며, 빗방울 떨어져 빗물이 되었나…” 이어 산악인 박인식의 애절한 ‘첫사랑’이 이어진다. “첫 사랑에 나는 울었네. 첫사랑에 나는 울었네. 나팔꽃 필 무렵 손수건을 흔들면서…” 화가 서영준이 “씨팔 나도 한 곡조”하며 벌떡 일어나 ‘선운사’를 노래한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산타는 시인 권경업은 ‘산홍’으로 기를 죽인다. “산홍아, 너만 가고 나만 홀로 남았구나. 너 없는 이 설움 백년이 넘을 건가, 천년이…” 시인 송 현도 청승맞게 ‘산장의 여인’을 들고 가세한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시인 김홍성의 ‘어디로 갈 거나’였다. 그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면 방안은 한순간에 숨을 죽이고 마른 침을 삼킨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술상 넘나들던 노래와 시와 불쇼

고등학교 1학년 때 등단한 포항의 천재시인 박경용은 만담으로 레퍼터리를 슬쩍 바꾼다. “구룡포 앞바다에 메루치만 팔딱팔딱! 갈매기는 오락가락! 백성은 많고 먹을 것은 없고! 개×이 올씨다!!” 자유당시절 그의 고향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던 어느 출마자의 연설을 흉내 낸다. 박 시인은 한번 입이 터지면 아무도 못 말린다. 결코 만담으로만 끝낼 사람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 나오더니 자연스럽게 “황성옛터에 밤은 깊어”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돌연 “모란이 피기까지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시낭송이 줄줄 나온다.

빙그레 웃고 있던 김종천 시인이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를 지그시 눈을 감고 읊는다. “알룩 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밭을 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천상기 기자가 질세라 고려말기의 선승 나옹 선사의 시를 읊조린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그 와중에 한 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듣고만 있는 사람도 있다. 작곡가 한돌이었다. 곁에선 아직 기회를 못 잡은 이상범 이창년 서 벌 신세훈 전연욱 정공채 진복희 허 유 시인이 이제나 저제나 끼어들 틈을 노리고 있다.

불쇼는 노래만 있는 게 아니었다. A씨와 B씨가 벌인 희대의 ‘양말주와 빤스주’사건은 바로 그 무렵에 터졌다. 어느 푹푹 찌는 여름날 저녁, A와 B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은 이미 얼큰한 상황이었다. 탁자엔 막걸리가 한 주전자 놓였다. A가 먼저 자신의 고린내 나는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는 막걸리 한 사발을 그 양말에 걸렀다. 그 다음 젖은 양말을 비틀어 짜니 검은 때 국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막걸리 잔은 금세 거무죽죽해졌다. A가 “자 이 술 한 잔 받으시라!!”며 B에게 내민다. B는 “좋아, 내가 마다할 소냐?”며 단숨에 마셔버린다.

이번엔 B차례. B는 바지를 훌훌 벗더니 와락 팬티마저 훌러덩 내린다. 그리고는 그 노란 뭐 묻은 사각팬티 한 쪽을 묶더니 거칠게 막걸리 한 사발을 거른다. 역시 B도 팬티를 비틀어 몇 방울 남은 것까지 짜낸다. “옛다, 이거나 처먹어라!!” B가 씩씩거리며 말한다. “씨발! 처먹으라니, 드십시오 그래야지!!” A가 맞받아친다. “드시든가 쳐 먹든가, 어쨌든 들이키라우!!” 결국 A가 눈을 질끈 감고 쭈욱~ 마신다. 주위에선 박수가 터져 나오고 낄낄 박장대소가 터진다. 정말 다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그렇게 천둥벌거숭이들이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한밤중 지지고 볶고 생난리를 치는데 시통에 아무 일 없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어느 날 무허가 심야영업으로 주인 한 씨가 새벽 1시에 종로경찰서에 잡혀간 것이다. 한 씨가 조사받고 나오니 새벽 3시. 시통은 알전구 환하게 켜진 채로 빈 술병만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정면 벽엔 “누님은 잡혀가고 우리는 술도 못 먹고 노태우만 욕하다 간다‘는 낙서가 써져 있었다.

그 때 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누님! 누님! 저 (박)상우예요. 누님 걱정돼서 여태 우리들 집에 못 갔어요. 괜찮아요?” 소설 쓰는 상우 일행이었다. 역시 그들은 가지 않고 걱정하고 있었다. 한 씨는 눈물이 핑 돌았다. 며칠 후 법원에서 등기우편이 날아왔다. ‘식품위생법 위반’에 벌금 30만원.

시통 식구들도 종종 벌금을 먹었다. 화장실이 멀어 문 앞에 양동이를 놔뒀지만 그걸 죽어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담벼락이나 전봇대에 실례하다가 경범죄위반으로 벌금을 먹었다. 할 말 없었다. 동료들은 그걸 보고 재밌어 죽겠다고 낄낄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계란 프라이에 술 좀 먹기로서니…

벌금 소식에 시통 식구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이두엽 서울 커뮤니케이션 대표가 펄펄 뛰었다.

“개새끼들! 빈대 간을 내먹어도 유분수지! 누님 또 합시다. 내가 10만원 보태줄 테니…. 누가 이기나 해 봅시다! 이 가난한 글쟁이들이, 계란프라이 해놓고 밤새 술 좀 먹기로서니, 불쌍한 누님 잡아다가, 벌금 매기다니… 아이구 치사하다 치사해.”

“그럼! 그럼! 하모! 하모! 개새끼 닭새끼 쥐새끼 염소새끼 모기새끼 빈대새끼 개구리새끼… 또 없냐? 치사한 새끼들…” 술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새끼에 새끼줄을 이어댔다.

“뭐? 시통이 벌금 먹었다고?” 이번엔 핏대들이 유난히 많은 신문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신문사 노조원들은 아예 시통에서 회의를 하거나 회식을 했다.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라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갔을 것이다/ 모래바람 불어, 모래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동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김신용 ‘도장골 시편-넝쿨의 힘’ 전문>

88년 여름, 지게꾼 시인 김신용이 화가 박광호와 홀연히 시통에 나타났다. 그는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보도블록 깔던 일용노동자였다. 구두닦이 껌팔이 지게꾼 매혈 어부까지 안 해본 게 없었다. 그 후 그는 가끔 나타나서 노트에 깨알처럼 쓴 시를 슬며시 내놓곤 멋쩍어 했다.

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공짜 술을 먹지 않았다. 한두 잔이라도 얻어먹었다 싶으면, 그 다음 반드시 그 빚을 갚고야 말았다. 당시 그는 서울역 앞 양동에서 한 달 12만 원짜리 사글세방에서 살았다.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이 나왔을 땐 시통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축하했다. 모두들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 시집은 시통식구인 김선유 시인이 당시 고려원 편집장이던 최승호 시인에게 보여 이뤄졌다.

그는 인세 200만원을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기 위해 1년 치 방세를 내고 연탄을 들였다. 그는 글 쓰는 게 평생소원이라고 말했다. 비록 1년 동안이지만 공사판 갈 걱정이 없어졌다. 먹고살 걱정 없이 맘껏 시를 쓸 수 있었다. 그는 1년 동안 낮엔 공사판 대신 남산 도서관을 찾았다. 밥은 한 끼쯤으로 때우고 미친 듯이 시를 썼다.

김신용은 술이 얼큰하면 목에 걸쳤던 수건을 풀어 색소폰 부는 흉내를 냈다. 한 쪽은 입에 물고 다른 한 쪽은 발로 밟고 그를 당겨 몸을 비틀었다. 그것은 마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달덩이 같은 호박 한 덩이를 올려놓은’ 호박넝쿨 같았다. 아! 그 끈질긴, 기어가는 것들의 힘이여!

< 2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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