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리더십 세상 품는다Ⅰ
부드러운 카리스마 뜨고, 강골 리더십 퇴조
“나는 인의 장막을 쳐놓고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말단 병사도 나를 부를 때는 이름만 부르면 됐다. 난 내 뺨에 화살을 쏜 적이나 포로까지 만나 함께 일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사나이답게 호탕하게 살았으므로 그것으로 족하다.” <칭기즈칸>
영화배우 최민수의 눈빛은 강렬하다. 검은 정장차림에 목을 꼿꼿이 세우고 목소리를 낮게 깔면 그야말로 ‘짱’이다. 사람들은 그를 카리스마가 대단하다고 말한다. 도대체 카리스마란 무엇인가. 최민수는 말한다. “카리스마란 가슴 속에 칼이 들어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칼이 가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카리스마는 사라진다.”
원로배우 이순재는 고개를 젓는다. “배우의 카리스마란 역할의 카리스마일 뿐이다. 결코 개인의 카리스마가 아니다. 그 배우에게 카리스마가 있다 없다 하는 것은 관객이 판단하는 것이다. 스스로 카리스마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모르겠다. 어쨌든 최민수는 최근 불미스러운 일로 하루아침에 ‘우스운 카리스마 주인공’이 돼버렸다. 그의 말대로라면 ‘가슴 밖으로 칼을 드러낸’ 탓이다. 그는 요즘 어느 산속에서 ‘자숙 하겠다’며 홀로 컨테이너 생활을 하고 있다. 과연 그의 카리스마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따뜻한 카리스마’의 리더가 뜨고 있다. ‘나를 따르라’는 식의 ‘강골리더’는 점점 빛을 잃고 있다. 강골리더는 추진력이 강하고 그때그때 대응이 빠르다. 그는 그 조직의 슈퍼맨이요 영웅이다. 웬만한 위기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칼 같은 판단력과 단호한 결단력은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강골리더도 사람이다. 자아가 강하다. 자칫 독선에 빠지기 쉽다. ‘도’ 아니면 ‘모’식의 충동적 정책을 좋아한다. 조직도 그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그만 쳐다본다.
만델라는 세계 최고의 카리스마 지도자다. 그는 24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눈에 살기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감옥에서 나와 그의 동포들 앞에서 행한 첫 마디도 한없이 겸손하기만 했다. “저는 선지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하찮은 종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라며 스스로 ‘국민의 종’임을 자처했다.
프로야구 한화의 김인식 감독은 죽어도 ‘선수 탓’을 하지 않는다. 설령 선수가 번트를 대지 못해 지더라도 “다 내 탓이여~” 한마디하고 끝이다. 감독이 잘못 가르쳐서 그랬으니 당연히 ‘감독 탓’이라는 논리다. 그는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선수도 완전무결한 선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실수한 선수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 스스로가 자책하고 있을 텐데, 거기에다가 감독이 왜 또 소금 뿌리는 말을 하느냐며 입을 다문다.
그렇다고 김인식 감독이 카리스마가 없는 건 아니다. 아니 8개 구단 그 어느 감독보다도 카리스마가 강하다. 다만 그 카리스마가 부드럽고 따뜻할 뿐이다. 팬들은 언젠가부터 그를 ‘국민감독’이라고 부른다.
‘엘리트주의’ 차범근 감독의 변화
차범근 프로축구 수원 감독은 ‘최고 1등주의’를 지향한다. 이른바 ‘프로는 애들 키우는 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최고의 선수들이 와서 멋진 경기를 보여주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현역시절 뛰었던 것처럼 선수들도 ‘최고의 열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차범근이 누구인가. 그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10년 동안 308경기에서 98골(A매치 127경기 55골)을 넣은 세계적인 스타다. 요즘 박지성이 프리미어 리그에서 1골 넣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걸 보면 현역시절 차범근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금세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스타출신이라고 해서 꼭 명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프로스포츠의 감독 중에는 스타 출신보다는 현역 때 이름 없던 선수 출신들이 훨씬 많다. 당장 축구에서 히딩크나 아드보카트 감독이 그렇다. 그들은 현역 땐 그저 그런 선수였었지만 지도자로선 세계적인 명감독으로 우뚝 섰다.
차 감독은 아직 지도자로서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91년 울산현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 팀에서 우승 트로피는 들어 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감독으로서 대회 도중에 경질되는 수모까지 당했다. 차 감독이 K리그에서 우승한 것은 2004년 수원삼성을 이끌고 딱 한번 뿐이다.
왜 그럴까. 선수들은 자신도 모르게 ‘차붐’이라는 카리스마에 주눅이 든다. 여기에 차 감독도 선수들에게 살갑게 다가가지 않는다. 차 감독은 ‘선수들은 프로로서 말 안 해도 당연히 스스로 알아서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쿵저러쿵 굳이 말이 필요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K리그는 분데스리가가 아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나 스페인, 이탈리아 리그는 더더욱 아니다. 선수들도 차 감독 만큼 잘할 수 있는 스타는 거의 없다. 결국 이렇게 되면 점점 선수들과 감독 사이는 멀어진다. 소통이 안 된다.
차 감독이 올 시즌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변했다. 귀를 활짝 열었다. 눈높이를 낮추고 팀의 새파랗게 젊은 선수들에게까지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난 겨울 차 감독은 여태까지 자신이 지명했던 주장을 선수들 스스로 투표로 뽑게 했다(송종국). 이것도 모자라 20대 초반(하태균), 20대 중후반(곽희주) 등 연령대별 주장제도까지 도입했다. 선수들의 이야기를 그들 눈높이에 맞춰 듣겠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그동안 겉으로만 뱅뱅 돌며 팀을 떠나려 하던 신영록을 찾아가 허심탄회한 대화로 맘을 돌리게 만들었다. 코치들에게도 권한을 대폭 위임했다. 조병득, 페차이올린 코치와 서정원, 이임생 트레이너에게 경기 전에 3-5-2, 3-4-3, 4-4-2 3가지 포메이션에 맞춰 각각 엔트리를 적어내게 했다. 차 감독은 이를 바탕으로 베스트 11을 짰다.
올 시즌 수원 삼성은 정규리그(10승1무)와 컵 대회(4승1무)를 합쳐 16경기 무패행진(6월10일 현재)으로 단독 1위를 질주하고 있다. 팀이 어려울 때마다 신영록 등 젊은 피들이 펄펄 날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차 감독은 경기 후 “젊은 선수들의 사기가 잔뜩 올라와 있고 신인과 중·고참 선수들 간 믿음과 신뢰가 더욱 돈독해지면서 경기력도 나아지고 있다”고 화답했다. “서포터스 그랑 블루에 감사한다”는 말도 꼭 빼놓지 않았다. 예전의 뻣뻣하고 자존심강한 ’엘리트주의‘ 차범근이 사라진 것이다.
업적 믿고 덤비려는 태도, 이젠 안 통해
기업에서도 비슷한 경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일 잘하던 부하직원이 상사가 된다고 모두 일을 잘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예가 훨씬 많다. 부하로 있었을 때의 조직과 그 조직의 리더가 됐을 때의 조직 파악은 하늘과 땅 차이다. 부하일 땐 자기 일만 잘 하면 된다. 그러나 리더는 조직의 크고 작은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
리더가 되면 자신의 과거 빛나는 실적은 다 버려야 한다. 자신의 업적만 믿고 덤비다간 큰 코 다친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시작하면 백이면 백 모두 실패한다. ‘내가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아는데, 부하직원들도 나 같이만 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다가는 불 보듯 백전백패다.
‘국보투수 출신’ 선동열 프로야구 삼성 감독은 말한다. “일본에서 생애 처음으로 2군 생활을 한 것이 지도자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때 생활을 하면서 백업선수들이나 2군 선수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됐고 삼성에서도 그때 생각을 하면서 선수들을 다독이고 역경을 이겨냈다. 2군 생활 때 빨래를 직접 하는 것이 가장 비참했다. 2군 선수들은 자신의 유니폼을 직접 빨아야 한다. 빨래를 하려면 일찍 가서 대기하지 않으면 2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한다. 프로에 들어와 한번도 빨래를 해본 적이 없는데다 외국인 선수이다 보니 후배들이 대신 해줄 리도 만무했다. 그때 겪은 서러움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큰 힘이 됐다.”
원시인과 우주인의 동거, 동행, 소통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사람이 휙휙 바뀌고 있다. 요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은 해와 지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생각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서로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할 수밖에 없다. 기성세대들에게 신세대는 ‘우주인’이나 마찬가지다. 신세대에게 기성세대는 ‘꼰대’를 지나 ‘원시인’이나 같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거나 이러한 우주인들이 해마다 ‘새 피’로 수혈되고 있다. 우주인과 기존 원시인이 동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것도 원시인이 리더로서 우주인을 끌고 가야한다. 바로 그 최전선에 스포츠 감독들이 있다. 기업은 그래도 원시인과 우주인 사이에 스펀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중간층이 두텁게 자리잡고 있다. 시간도 비교적 넉넉하다.
스포츠 감독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주인들과 매순간 직접 살을 부딪쳐야 한다. 이들을 이끌고 나가서 싸워 이겨야 한다. 패배는 곧 감독의 목이 달아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1년, 잘해야 2년 정도다. 절박하다.
기업은 실패해도 한직으로 밀려날지는 모르지만 목까지 달아나진 않는다. 스포츠 세계에서 좋든 싫든 감독과 선수가 한 마음이 되지 못하면 그 팀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감독은 선수들의 마음을 낚아야 하고, 선수는 감독의 뜻을 읽어야 한다. 사람이 바뀌면 리더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옛날 방식으로는 새로운 사람들을 끌고 갈 수 없다.
부드러운 감독들은 대부분 소통에 뛰어나다. 선수들의 마음을 한눈에 읽고 스킨십을 잘한다. 소통은 말을 많이 한다고 잘 되는 게 아니다. 말은 어눌해도 진심이 담기면 슬슬 풀린다. 안철수 KAIST 석좌교수는 “아는 것이 아무리 깊고 넓어도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지금은 사실이 아닌, 사실에 대한 타인의 인식이 진실인 시대이다”라고 말한다. ‘현대경영학 아버지’ 피터 드러커도 고개를 끄덕인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소리’와 ‘기대’다. 그러나 소리는 누군가 듣는 사람이 없으면 소리가 없는 것과 같다. 커뮤니케이션도 그렇다. 발신자가 아무리 발신을 해도 수신자가 듣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은 없는 거나 같다. 대체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며 듣고자 하는 것만을 듣는다. 수신자가 바라지 않았던 것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오직 무시당하거나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의 경험에 맞추어 말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목수와 얘기할 때는 목수가 사용하는 말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발신자가 수신자의 언어 혹은 수신자가 사용하는 용어로 말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수신자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아야 커뮤니케이션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수신자의 기대를 깨트려 ‘각성’을 하게 할 필요가 있을 때의 커뮤니케이션과 수신자를 설득하려 할 때의 커뮤니케이션은 분명 접근 방법부터 다를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와 전혀 다르다. 커뮤니케이션이 ‘지각’인 반면 ‘정보’는 논리다. 정보는 정서, 가치관, 기대, 지각 같은 인간적인 속성이 없을수록 그 신뢰성이 높아진다. 이에 비해 가장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은 어떠한 논리도 필요 없는 ‘순수한 경험의 공유(SHARED EXPERIENCE)’다.” <넥스트 소사이어티>
봉투에 든 것은 돈 아닌 ‘힘내라’는 감동편지
남자프로농구 동부의 전창진 감독은 선수들과 수시로 이야기한다. 힘들어하는 선수, 슬럼프에 빠진 선수, 앞에서 끌고 가야할 고참 선수 등을 따로 불러 밥을 사며 이야기를 나눈다. 위축돼 있는 선수들에겐 직접 쓴 편지를 건네주며 등을 두드려준다.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이런 선수들은 감독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간접대화가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수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는 것이다.
“잘못하는 선수에게 ‘쟤 바꿔!’ 하면 선수생명이 끝난다. 대신 무슨 일 있어? 하며 이야기를 나눠보면 반드시 문제가 나온다.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선수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감독에게 감동한다. 난 벤치멤버에게도 못 나가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식스 맨들도 마음을 한번 열면 죽어라 뛴다.”
결국 전창진 감독의 따뜻한 리더십은 동부의 2007~2008시즌 우승으로 이어졌다. 가족 같은 끈적끈적한 팀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주전 가드 표명일은 "우리 팀의 강점은 선수들 모두 욕심을 내지 않고 단합해서 뭔가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챔피언 결정 3차전에서 패한 뒤 힘들어할 때 감독님이 문자 메시지로 격려를 해줬다. 죄송하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그러면서 배운다. 괜찮다'고 답글을 보내주셨다. 사소한 일도 세세하게 챙겨주시기에 선수들이 큰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간판 슈터 역할을 맡았던 강대협도 "형제처럼 지낼 정도로 우리 팀은 서로 형, 동생처럼 잘 대해 준다. 여러 팀을 거친 선수도 있어 자기마다 색깔이 다르고 고액 연봉자와 저액 연봉자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걸 따지지 않는다. 동료애가 돈독해지면 조직력도 살아난다. 한 사람에 의존하거나 이름으로 농구를 하는 시기는 지났다. 팀워크가 맞아야지 조직력도 더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우승의 주인공 김주성은 “최고의 감독이신데도 일일이 선수들을 챙기면서 문자도 보내고 편지도 써줘 힘이 됐다. 나에게는 주로 '항상 고생하는 걸 알지만 그래도 네가 잘 해야 팀이 잘 된다'는 문자를 주로 보내주신다. 한 번은 봉투를 주기에 돈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뜯어보니 ‘힘내라’는 편지였다”며 웃었다.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