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환우 여름캠프 "새 소식 듣고 힘 얻어 행운"
백혈병 환우모임, 홍성서 즐거운 만남 가져
지하도에서 한 명씩 올라올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포옹하는 사람, 악수를
하며 인사하는 사람, 그 틈 사이를 뛰어다니며 장난치는 아이들…. 토요일인 지난달
28일 아침 서울역 광장은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이 오랜 만에 만나듯
반가움에 들뜬 사람들로 부산했다. 이들은 모두 난치병인 만성골수성 백혈병을 앓고
있는 환우와 그 가족들로 이 날 1년에 한 번 있는 환우 모임을 위해 모여든 것.
만성골수성 백혈병 환자들의 등산동호회 ‘루 산우회’는 지난달 28, 29일 이틀간에
걸쳐 충남 홍성군 용봉산 청소년수련원에서 하계캠프를 열었다. 전국에서 모인 환우와
가족 185명은 캠프 기간 동안 서바이벌 경기, 수구, 4륜바이크 타기, 노래자랑, 영화관람,
용봉산 등반 등을 함께 했다. 백혈병에 대한 OX퀴즈를 통해 함께 어울려 공부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정기만남 통해 새로운 지식-정보 교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치료하다가 부작용이 생겨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거나,
약에 내성이 생겨 어려움을 겪는 환우가 많았죠. 이런 정기 모임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과 새로운 정보를 교수님에게 확인받을 수도 있고, 다른 환우들의 모습에 용기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모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요.”
한 환우는 8시간 걸려 포항에서 오기도 했다. 이름이 알려져 남들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싫다는 환우들. 세상에 노출되기를 꺼려하는 백혈병 환우들이 이처럼
한 자리에 모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185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
경기도 일산시 일산4동에 사는 이가영(가명,51) 씨는 이 모임을 제 2 인생의 시작점으로
여긴다. 그는 3년 전 모시던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여유가 생겼을 때 남편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남편은 계속 ‘죽고 싶다’고 말했어요.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라고 계속 말했죠. 그걸 지켜보는
저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때 이 캠프에 참석해 다른 환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어요. 20년을 의미 없이 사는 것보다 10년을 살더라도 지금처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죠. 요즘엔 남편과 저는 남편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도 잘 인식하지 못해요. 환우들 덕에 용기를 얻어 요즘 하루하루 신혼처럼
보냅니다.”
“다른 환우 따라 약 먹고도 아이 가졌어요”
루 산우회 최종섭(55) 회장은 “만성골수성 백혈병 남성 환자 12명이 약을 복용하면서도
‘글리벡 베이비’ 16명을 얻었다”면서 “이들 모두 다른 환우들이 백혈병 약을
복용하면서 정상적인 아이를 얻는 것을 보고 아이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한 환우의 모습에서는 행복함이 묻어났다.
“처음엔 백혈병 치료약을 복용하면 아이를 갖는 건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남성의 경우 별 문제가 없다는 걸 다른 환우들의 모습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요즘 아무런 문제없이 자라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처음 백혈병에 걸렸을 때의 절망감은
잊은 채 아이를 키우는 보람 속에 빠져 살아요.”
가톨릭의대 만성골수성 백혈병 연구소 김동욱 교수도 매년 캠프에 참가하고 있다.
그는 “연구하고 있는 혈액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면 연구를 할 때 사명감도 들고 목적의식도 확고해지기 때문에 참가한다”고 밝혔다.
얘기꽃에 어려움 잊고, 산 오르며 건강 챙기고
그는 “백혈병 환자들은 처음 병에 걸렸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라고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환우 모임이 남들에게 하기 힘든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수 있고 산행을 통해 건강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어떤 성격의 모임이라도 전국에서 185명의 환자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기는
쉽지 않아요. 좋은 의사선생님과 가족 같은 환우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이런 점에서 백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어떻게 보면 다른 병에 걸린 사람들보다
행운아라고 할 수 있죠.”
최종섭 회장은 자신이 난치병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환자이면서도 스스로 ‘행운아’라고
표현했다.
▽ 만성골수성 백혈병이란?
만성골수성 백혈병은 필라델피아 염색체라고 하는 이상 염색체가 ‘백혈병 세포를
대량으로 만들어!’라는 지령을 끊임없이 내려서 백혈병 세포가 대량으로 늘어나는
병이다. 초기 증상은 피로, 쇠약감, 안면 창백, 멍, 코피, 잇몸 출혈 등이다. 병이
진행되면서 잇몸 비대증 등이 나타난다. 다리, 팔, 허리뼈와 관절에 통증이 있고
중추 신경계에 전이가 된 경우 심한 두통과 구토, 복수가 생기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백혈병 발생 빈도는 매년 10만 명당 5명꼴. 이 중 만성골수성 백혈병 환자는 전체
백혈병 환자의 10% 정도다. 현재 만성골수성 백혈병 환자는 약 2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발병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000년 6월부터 전 세계 170개 이상의
병원에서 시작한 초기 만성골수성 백혈병 환자의 임상시험에 따르면,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에 의한 5년 생존율은 89%에 이를 정도로 생존율이 높다. 환자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불편이 없다.
<루 산우회 하계캠프 현장> 동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