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자주 끊겨도 알코올중독

알코올 독소가 기억 입력 방해···술자리 피하는 게 상책

‘필름’ 자주 끊겨도 알코올중독벤처사업가 K씨는 얼마 전 금요일 오후에 ‘갑’의 관계에 있는 대기업 간부 M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일 티업 어디서 하기로 했나요? 연락이 없어서….”

K씨는 눈앞이 깜깜했다. 골프 약속이 아예 기억조차 없었다. M씨를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필름’이 끊긴 채 제안한 것 같은데…. 부랴부랴 부킹을 시도해 C급 골프장을 겨우

잡았다. 그러나 M씨는 예약된 골프장 이름을 듣더니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며

퇴짜를 놓았다.

‘필름 절단 사고’. K씨 경우가 남의 일 같지 않은 모주망태가 적지 않다. 사회적

손실도 막대해 보건복지가족부가 16일 ‘필름이 끊겼던 시간, 당신은 책임질 수 있습니까?’라는

절주(節酒) 캠페인을 시작했을 정도다.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행복 호르몬’ 세라토닌의

분비가 감소해 술은 더 당기고 취할 가능성은 커진다. 술꾼에겐 특별주의기간인 셈이다. 

우즈도 몰아경지 때 비슷한 증상

음주 등으로 필름이 끊기는 것을 영어로 ‘블랙아웃(blackout)’이라고 한다.

원래 군사용어로, 전투기 조종사가 전투기를 급상승시킬 때 일시적으로 생기는 시각장애나,

공습에 대비한 등화관제 등을 가리킨다.

의학적으로는 다이버들이 갑자기 깊은 수심에 들어갔을 때 기억이 끊기는 것도

블랙아웃이라고 한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결정적 순간에 몰아경지에 들어가

자신의 스윙을 잊어 버린다고 하는데 이것도 일종의 블랙아웃이다.

필름이 끊기는 것은 알코올의 독소가 뇌에서 기억의 입력을 담당하는 해마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독소가 직접 뇌세포를 파괴하기보다는 신경세포 사이의 신호전달

메커니즘을 방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뇌에 기억이 아예 입력되지 않았으므로 전문가가

최면을 걸어도 ‘그때’를 기억할 수 없다.

K씨처럼 뇌의 다른 기능은 거의 정상적인 채 필름이 끊기면 술자리의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뇌가 이전에 저장된 정보를 꺼내고 사용하는 데는

이상이 없기 때문에 집에도 무사히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필름만 끊길 정도로

‘적당히’ 술에 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반면 일부 술꾼은 독특한 유전자 덕분에

아무리 마셔도 필름이 끊기지 않는다. 

방치하면 치매나 뇌졸중 위험

음주 뒤 필름이 끊긴다고 곧바로 알코올 중독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매년 두세 차례 이상 ‘절단 사고’가 나면 알코올 중독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필름이

끊기는 일 때문에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데도 계속 술을 마시면 분명 알코올 중독이다.

필름이 계속 끊기는데도 술잔을 놓지 못하면 비타민 B1(티아민)이 파괴돼 보행

장애, 안구 운동 장애, 혼수 등의 증세가 나타나는 베르니케 뇌증에 걸릴 수 있다.

이 병의 증세는 크로이츠펠트 야코프병(CJD)이나 인간광우병인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코프병(v-CJD)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 이 병의 증세가 악화되면 기억을 하지 못해

거짓말을 하는 코르사코프 정신병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심각한 병이 오지 않는다

해도 치매나 뇌졸중 등의 위험이 커진다.

따라서 필름이 자주 끊기면 술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피치 못할 술자리라면

물을 많이 마시고 안주를 많이 먹는 등 가급적 취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운동을 적절히 하면 뇌가 건강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으므로 일주일에 최소한 세

번 이상 땀을 흘리는 것이 좋다.

티아민 보충도 도움이 된다. 티아민은 술뿐 아니라 항생제·카페인·경구피임약

등을 먹어도 파괴된다. 음식물에서는 현미·계란 노른자·생선·돼지고기·완두콩

등에 풍부하다. 티아민은 하루 25~100㎎이면 충분하지만 알코올 중독자에겐 100㎎

이상을 권한다. 일부 영양제는 IU 단위를 쓰는데 ㎎에 1.5를 곱하면 된다. 비타민

영양제는 커피나 차와 함께 먹으면 활성이 떨어진다. 티아민이 체내에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마그네슘을 같이 섭취해주는 게 좋다. 마그네슘은 녹색 잎 채소나 견과류·씨앗류,

그리고 현미·통밀·통보리 등 전곡류와 콩에 많다.

또 술을 많이 마시면 B6(피리독신)·B9(엽산) 등 뇌 신경계에 필수적인

비타민 B군이 파괴되므로 필름이 자주 끊기는 술꾼은 이를 보충해야 한다. 피리독신은

계란·닭고기·전곡류·콩·양배추·시금치·당근

등에 풍부하고 엽산은 현미·아스파라거스·보리·치즈·쇠고기·닭고기·콩·푸른

잎 채소·전곡류 등에 많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박용우(리셋클리닉 원장) 박사는

“술꾼은 대개 식습관이 나빠 음식을 통해 이들 비타민을 섭취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비타민제를 별도로 복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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