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이름을 불러 주세요
의사와 환자의 의사(意思)가 통해야 의료개혁 가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명시(名詩) ‘꽃’이다. 일본 유학길에 일왕과 총독정치를 비방했다는
죄로 영어(囹圄)의 몸이 된 시인,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국회의원까지 지낸 이 시인의
뜻 깊은 메시지는 의료현장과도 무관치 않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사람 중에 병원의 환자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환자는 단순한 호명(呼名)이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 직원이 “혜영씨, 오늘은 어때요?”라고
부르며 사람으로 대해주는 것을 간구한다.
새해에는 의료인이 환자의 이름을 불러주자는 제안은 뜬금없는 것일까? 그래서
의료인과 환자가 서로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자는 것은 인숭무레기의 세상물정
모르는 넋두리일까?
우리나라의 의료인과 환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외국인이 우리의 진료실을
구경하면, 그 뜨악함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온기 없는 진료실은 당연히 역사,
사회적 배경의 산물이다.
한반도에서 18세기 후반 일본에 의해 서양식 병원이 선보였지만, 서양의학은 1895년
고종이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혜원’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움텄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서양의사들은 천하의 명의, 파란 눈의 편작(扁鵲)이었다.
고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병들을 ‘뚝딱뚝딱’ 고쳤으니 환자들이 줄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신문명을 적극 받아들인 가문을 중심으로 의사들이 배출됐다. 또 이데올로기
전쟁의 시대에서 의사는 좌우의 칼에 희생되지 않으면서도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의사=선생님’이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존경의 눈길을 받는 것이 늘 이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1970년대 급작스런 의료보험의 도입으로 의사의 역할모델이 뒤흔들렸다.
의사는 갑자기 밀려오는 환자들을 진료해야 했고, 반면 저수가 시대에 정부가 용인한
각종 편법으로 ‘기업화’를 실행하는 의사도 생겼다. 산업사회의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의료영역에서도 변질돼 적용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2001년 정부가 의약분업을 실시하면서
의료인을 이상야릇하게 매도하고, 의사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대항하면서 의사의
지위가 또다시 요동쳤다. 이 와중에 의사가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적었다.
의료가 대량생산 또는 상업의 영역에 내팽개쳐 방치될수록, 의사와 정부가 대립각을
내세울수록, 의사와 환자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 하버드대 제롬 그루프먼 교수는
최근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닥터스 씽킹》을 통해 “오진이 양산되는
것은 장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사와 환자가 멀어지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첨단 진단장비가 도입돼도 의사가 열린 마음을 갖고 환자를 진료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잇단 연구결과 밝혀지고 있다.
의료 현장이 경제성과 외형 중시로 흘러 사람이 사라지면 결국 피해는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최근 정부의 의료기관에 대한 외형 평가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의료산업선진화론>도 이런 면에서 위험하다. 의료는 대량생산-소비의
산업적 메커니즘으로 풀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대량생산-대량소비로
갈수록 의료의 질은 떨어지기 십상이다.
정부는 오히려 의사가 충분히 환자를 진료하고 여러 각도로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국민이 건강해지는 것을 비용의 낭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건강해진 국민이 생산현장에서 뛰어난 생산성을 발휘하도록, 의료는 사회간접자본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자유시장적 자본주의에서 의료의 역할이다. 절대 의료인에게
돈을 벌라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 이명박 정부의 공약이 참여정부의 의료산업선진화론을
답습하는 것 같아 안쓰럽기 그지없다. 이 정부가 사회 버팀목으로서의 의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루빨리 인식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의료인이 현재의 테두리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필자는 그 첫걸음으로 의료인이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진료실 문화를 만들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의사와 환자의 의사(意思)가 통하는 의료개혁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필자가 만난 몇몇 의사들은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환자의 병소(病巢)를
보면 어떤 환자인지 구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환자는 ‘도구적 인간’이 아니다.
환자는 진단영상과 병리검사의 총합 이상이다. 어떤 의사는 환자를 사람으로 보면
‘감정의 오류’에 빠진다고 반박을 하던데, 범주(範疇)가 다른 이야기다. 그동안
기형적인 의료시스템에서 사람이 아니라 대상으로 취급당해온 환자들도 저마다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 하나의 우주(宇宙)다.
새해부터는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자. 환자가 의료인에게 와서 꽃이 되면,
의료인은 향기로운 꽃밭이 된다. 누가 함부로 들어오기 조차 두려운 아름다운 꽃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