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제3의 황우석의 나라
이런 분들의 뇌는 정말 다른 사람과 다를까. 이들의 뇌도 상습적 거짓말쟁이의 뇌처럼 정보를 빨리 처리하는 백색질이 정보를 관리하는 회백질보다 더 많을까. 집안에 꽁꽁 칩거(蟄居)하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반성을 거듭해도 시원치 않을 박기영 전 청와대 전 과학기술보좌관이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김선종의 섞어심기가 없었다면 줄기세포를 만들었다”고 주장할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사기극’의 주연급 여우(女優) 조연이 운을 띠우더니, 마침내 주연인 황우석 박사가 “메머드 복제를 위해 러시아 마피아에게 돈을 줬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필자가 졸저 ‘황우석의 나라’에서 황우석 사기극은 반증이 가능해야 할 과학을 반증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옮겨놓아 생긴 비극이라고 진단했는데, 이 역시 비슷한 수법이 아닌가. 필경 후안무치(厚顔無恥)란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황 박사는 한술 더 떠 서울대의 파면 처분이 부당하다며 서울행정법원에 파면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역시 나라를 쥐고 흔들만한, 대단한 인물이다. 일련의 에피소드를 보며 지난 2년여의 일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갔다. ‘황우석의 나라’를 출간하고 나서 아이들이 하교 길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가슴 졸여야 했던 시간들, 정든 동아일보사의 일부 선후배로부터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2년 멀리했던 담배를 다시 찾았던 순간, 결혼 12년을 전업 주부로 지내다 기꺼이 학습지 교사로 나선 아내에게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못해 망설이던 시간들…. 어쩌면 황 박사는 필자에게 은인일지도 모른다, 황 사기극은 필자에게 새 삶의 계기가 됐으니까. 그 길은 언론사 기자로 안주하는 것보다 더 큰 소명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더러 황우석 사태에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모두 잘 살고 있는데, 왜 애먼 내가 고난의 십자가를 메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 아닌가. 황 사기극에서는 주연인 황 박사 뿐 아니라 제작자, 연출자, 각본, 조연 등 누구도 책임다운 책임을 지지 않았다. 책임을 지워야 할 사람도 임무에 태만했다. 이런 의미에서 검찰이 피의자의 구속 여부를 놓고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쓴웃음이 난다. 검찰은 황우석 사태의 책임자 누구에게도 그 흔한 구속영장을 한 장도 청구하지 않았다. 황 교수는 국가의 천문학적 돈을 낭비하고 횡령했다. 국민의 희망, 어린이의 꿈을 앗아갔으며 환자의 실낱같은 희망을 부풀렸다 터뜨렸다.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의 원칙에 따르면, 검찰은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이슈화하기에 부끄러운 과거를 지근거리에 갖고 있는 셈이다. 서울대병원의 관계자는 “수많은 환자가 줄기세포 허브 때문에 절망을 맛봤지만 병원 차원에서 어떤 진솔한 사과도 없었다”며 “환자들 중에서는 줄기세포 치료를 받으려고 이에 부정적인 아내와 이혼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의 몇몇 교수는 황 교수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안규리 교수가 내과 분과장에 임명된 이후 언론에서 문제를 제기하자 “그게 무슨 문제냐”고 목청을 높였다. 사람의 본성 가운데 수오지심(羞惡之心) 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꺼림칙한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혹시 의사 집단의 독특한 동료의식이 이런 본성마저 가린 것은 아니기를 간절히 빈다. 또 서울대병원 못지않은 규모와 권위를 자랑하는 한 병원의 최고 간부는 황 교수의 죄과가 드러나는 순간에도 “이순신 장군님 같은 분을 음해하는 세력이 우리 학교에 있다”며 “이런 사람을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필자는 그 사람이 힘들게 진실을 위해 싸워온 교수들에게 사과했다는 얘기를 아직 듣지 못했다. 필자는 황우석 사기극은 사기 자체의 문제보다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을 안지는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부풀대로 부풀어진 채 문제가 ‘뻥’ 터졌다면, 그 이후에라도 오류를 고치는 과정에 들어가야 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이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것이 필자를 울가망하게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제2, 제3의 황우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황우석 박사도 힘을 받아 재기하려는 판이니…. 1980년대 미국에서 국립보건원(NIH), 예일대, 하버드대 등에서 잇따라 과학 사기극이 터진 뒤 국가 차원에서 ‘고어청문회’를 통해 심도 깊게 문제를 짚고 대책을 마련한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필자는 ‘황우석의 나라’를 쓰고 제발 더 이상은 이런 일은 없기를 기도했지만 필자의 꿈일 뿐, 황우석 사기극과 비슷한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현재 몇몇 영역에서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이 ‘과학 사기꾼’과 맞서고 있다. 필자는 황우석 사태 때 밤을 새워 논문 조작을 밝혀낸 ‘브릭’의 젊은 과학자들에 못지않게 이들에게서 한국 사회의 희망을 본다. 양심적 의사들의 의롭지만, 외로운 싸움들에서 필자는 또 다른 황우석의 나라를 느낄 수밖에 없다. 과연 ‘황우석의 나라’는 망하지 않았고 되풀이되고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