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 나오셨어요”…이상한 존댓말 번진다
정체불명의 존댓말, 병원 식당 백화점을 떠돈다
“아동복은 3층이십니다. 안타깝지만 내일부터 세일이십니다.”
대기업 사원 K씨(35)는 아내와 함께 5살배기 아들의 옷을 사러 백화점에 들어갔다가
직원의 말에 신경이 거슬렸다. 손님인 나를 위해 높임말을 쓰려고 하는 것은 알겠는데
나와 아무 상관없는 아동복과 세일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한사람에게 말한다고 고쳐질까?’ ‘괜히 나만 이상한 손님 취급받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그만뒀다.
미국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4년 동안 살다가 지난해 말
귀국한 Y씨는 건강 검진을 받으려고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가
직원들의 매우 특이한 어법에 놀랐다. 컴퓨터 단층촬영(CT)장소로 안내하러 온 직원은
정체불명의 말들을 쏟아냈다.
“환자님, 침대에서 조심히 내려오시께요.” “엘리베이터를 타시고 이동하시께요.”
“여기서 기다리시면 안쪽에서 이름을 부르시께요.” “그럼 검사하시께요.”
환자를 공대하기 위한 표현이란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LA 한인사회에서도
듣지 못했던 이상한 우리말이었다. Y씨는 진료가 진행되는 내내 어법이 깨진 존댓말을
들으면서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Y씨는 이를 ‘변종 존댓말’이라고 불렀다.
잘못된 존대어법은 음식점에서도 흔하게 쓰이고 있다. 5일 저녁 매운 쇠고기 요리로
유명한 서울 역삼동의 한 중국음식점에 동료들과 같이 간 김선영 씨(35)는 실소하고
말았다. 상냥한 직원의 말. “어서 오십시오. 덥습니다. 여기 가운데 탁자가 가장
시원하십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자장면에는 극존대를 쓰고, 나를 낳아준 부모에게는 반말을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장면 나오셨습니다”는 예사로 들을 수 있고, “아빠,
밥 먹었어?”는 드라마 대사로 자연스럽게 통용된다. 할머니를 ‘데리고’ 병원에
간 손자는 지극히 정상이며, 자칫하면 “김밥님 옆구리 터지셨습니다”도 등장할
판이다.
특히 서비스업에서 존대어법이 무너지는 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비스
산업이 발전하면서 ‘손님은 왕’이라는 이유로 고객 우대를 강요받다 보니, 종업원의
존대어법이 헤퍼지고 무조건 높이고 보는 잘못된 어법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도
해석된다.
국립국어원 정희창 연구관은 “존댓말은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인물이나 이야기를
하는 상대를 높이는 표현으로 ‘-시-’가 들어가는데 최근에는 과다하게 쓰는 일이
매우 흔하다”고 말했다.
말과 글은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고 사회 구성원의 약속이며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 기본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누구도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 의대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언어는 정신의 주요 구성요소인데 사람들이
언어의 파괴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사회전체의 건전성이라는 측면에서 우려할 만하다”며
“기본적으로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데다가 교육의 부재가 언어문화의 파괴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권 교수는 “물건에 대한 존대표현은 무의식적인 ‘물상숭배’의 표출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는데 몇 사람이 이 기괴한 표현을 계속 쓰면 옆 사람도 전염된다”면서
“온라인에서의 언어파괴가 현실세계의 언어파괴로 이어지는 측면도 강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