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없던 부르조아풍 의상, 근대화 상징물로
●이재태의 종 이야기(11)
바르셀로나의 파라솔을 든 부인
1492년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은 마지막 이슬람왕국이었던 그라나다를 멸망시키며 750년간 스페인을 지배하던 이슬람을 완전히 아프리카로 몰아내었다. 같은 해 기독교 왕국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연합하여 스페인 왕국을 세웠고,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이탈리아 항해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탐험을 지원하였다.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광범위한 식민지를 개척하여, 금은보화를 빼앗아 왔다. 16세기부터 스페인은 축적된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문화와 건축이 발전하고 문학과 철학이 융성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잉글랜드,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며, 유럽 각국의 정치에 관여하는 강력한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는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국고가 바닥나고, 특히 18세기 초의 왕위계승 전쟁으로 국내 상태가 혼란해지며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18세기 부르봉 왕조가 들어와서 행정 개혁을 실행하며 다시 국가를 부흥시키고자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왕당파와 국민파의 내부 갈등이 극심해졌다. 스페인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패하였고 1821년 멕시코의 독립을 기점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이 연이어 독립함으로써 국력이 더욱 쇠퇴하였다. 마침내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쿠바, 필리핀을 뺏기고 과거의 명성을 뒤로한 채 초라한 20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시기였던 1888년 인구 45만이던 스페인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에 만국박람회(엑스포)가 개최되었다.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는 1888년 4월 8일에서 12월 9일까지 8개월 동안 2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시우타델라 공원(Parque de la Ciudaleta)에서 개최되었고, 이 기간 중 224만명의 방문객이 바르셀로나를 찾았다. 쇠퇴한 중세도시였던 바르셀로나에는 엑스포를 통하여 많은 예술품이 설치되고 고딕 스타일의 건물들이 축조되었다. 바르셀로나 시는 만국박람회 개최를 위해 개선문(Arc de Triomf)을 세워 도시의 새로운 정문을 만들고,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한 콜럼버스의 대형 기념탑을 건축하는 등 도심을 재 단장하였다. 바르셀로나 박람회에서는 도시 방어를 담당하던 요새를 시우타델라 공원으로 만들어 박람회 주 전시공간으로 사용했는데, 이 공원 내에 동물원과 자연사박물관 등의 공공문화 시설도 지어졌다. 시내에는 박물관과 전시장 외에도 호텔과 식당들이 지어졌고, 현재 바르셀로나 시에서 가장 명소인 람블라 거리(La Rambla)도 이때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렇게 만국박람회를 위하여 정비된 공간은 115곳에 이르는데, 이를 계기로 바르셀로나는 비로소 근대적인 유럽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 박람회 개최에 즈음하여 주 전시장이었던 시우타델라 공원 내의 동물원에는 아름다운 분수대가 설치되었다. 폰체레(J. Fontseré)가 설계한 분수대 위에는 솔레 (J. Roig i Solé, 1835-1918)가 조각한 “파라솔을 든 부인: La Dama del Paraigua”이라 명명된 대리석 조각이 있다. 그는 남부 바르셀로나 출신이며, 그 당시 솔레는 이미 바르셀로나 거리, 아파트, 교회, 극장, 공원 등에 많은 천사나 기독교 성인작품을 조각하였던 유명 예술가였다. “파라솔을 든 부인”은 19세기 당시 유행하던 드레스를 입은 전형적인 바르셀로나의 부르조아풍 부인이 우산을 펼치며 고개를 살짝 쳐든 모습이다. 이러한 복장은 그 당시에 살았던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발자크의 소설에 묘사된 귀부인들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이 아름다운 조각상은 당시에는 획기적으로 근대의상 차림의 부르조아 부인을 조각하여, 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예술품이라는데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 이전 유럽의 조각품이나 동상들은 모두 로만 로브(roman robes)라는 로마시대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작되었는데, 이 조각품에서 처음으로 이 개념을 탈피한 근대화의 상징적인 조각상이어서 미술사. 문화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그녀는 탄생한지 100년이 넘은 지금도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물을 우산으로 막으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비가 적은 카탈로니아 지방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시우타델라 공원의 부인에게 가뭄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기원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파라솔을 든 부인은 작은 청동종으로도 복제되었는데, 영국에서 구입한 이 청동종은 높이 16cm, 직경 7cm의 크기이다.
파라솔(우산이나 양산)은 기원전 1200년 이집트에서도 사용된 기록이 있다. 고대에서는 양산은 하늘을 받치는 신성한 물건이라 여겼고, 양산을 쓰는 일은 곧 하늘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다는 표시였으므로 왕의 행차나 종교 행사에는 반드시 양산을 펼쳤다. 그러나 이에 반해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쓰는 것은 남성의 ‘나약함’을 상징한다고 하여 우산 대신 모자를 쓰거나 마차를 탔다. 이처럼 비를 피하려는 행동은 남성다움에 어긋난다는 선입견으로 남성들은 여성과 동반하였을 경우에만 우산을 이용했다. 반면에 여성들에게 우산은 비를 막아주는 도구이자 액세서리였고, 지위와 부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우산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박물학자 헨웨이는 1750년부터 무려 30년 동안 비가 오지 않더라도 외출할 때면 항상 우산을 갖고 다녀 사람들에게서 호모라는 놀림과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우산의 대중화가 이루어져 자신들의 생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한 마부들은 구정물 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나 헨웨이는 우직하게 그 굴욕감을 참았고, 차츰 사람들은 우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약함’의 상징이었던 우산은 영국 신사들의 애용품이 되었고 19세기부터는 일반화되어 남성들도 우산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파라솔이 일상에 널리 이용된 후에는, 근대 회화에도 파리솔을 든 모습들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는데, 구스타브 까이오보트의 “비오는 파리 거리(1877년)” 르노아르의 “우산(1883)”등은 잘 알려진 작품이다. 특히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는 ”파라솔을 든 여인“에 관한 여러 시리즈의 그림을 남겼다.
※ 이재태의 종 이야기 이전 시리즈
⑤ 딸의 작전에 넘어가 맞은 ‘그녀’... 종도 20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