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천재.... 주짓수 새 장 연 약골 엘리오
●이춘성의 세상 읽기(5)
격투기 100배 즐기기 ③ / 브라질리안 주짓수
그레이시 가문은 1801년 스코틀랜드로부터 브라질로 이민을 왔다. 1900년대 초반 마에다 미츠요가 가스타우 그레이시의 큰 아들 카를로스 그레이시에게 유술을 전수한 기간은 4년이다. 당시 일본인이 아닌 사람에게 유술을 가르치는 것은 일본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마에다는 개의치 않고 15세였던 카를로스를 가르쳤다. 마에다가 떠난 후 카를로스는 도장을 세워 자신의 형제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짓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내 동생인 엘리오 그레이시(Helio Gracie)는 몸이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았다. 하루는 카를로스에게 주짓수 레슨을 받던 브라질 은행장(Director, Bank of Brazil)인 마리오(Mario) 박사가 레슨을 받으러 왔는데 도장에 엘리오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엘리오가 평소 곁눈질로 익혔던 실력으로 마리오 박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마리오 박사는 엘리오의 레슨에 대만족하여 계속 엘리오에게 배우기를 원했다. 이를 계기로 엘리오가 본격적으로 주짓수를 연마하게 되면서 주짓수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엘리오 그레이시 (Helio Gracie) : 우연한 기회에 주짓수를 시작하게 된 엘리오의 숨은 재능이 점차 빛을 발하게 된다. 브라질 주짓수의 원조인 맏형 카를로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동생 엘리오의 천재성을 인정하게 된다. 엘리오는 기존 유술이 힘을 필요로 하는데 반해, 자신과 같이 힘이 약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힘을 레버지리로 이용하는 기술이 절실함을 깨닫고 이를 개발하는데 일로매진하게 된다. 이점에서 엘리오는 일본의 카노 지고로와 유사하다. 엘리오의 주된 관심사는 누워서 하는 기술(ground technique)의 개발이었다. 전통적인 유술, 유도, 레슬링 등은 상대를 바닥에 눕히는 것으로 승부의 끝이었다. 하지만 실전 격투에서는 바닥에 눕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엘리오는 누운 상태에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조르기, 질식시키기 등의 기술을 개발하여 마에다의 주짓수를 현대 주짓수(브라질리안 주짓수 또는 그레이시 주짓수)로 발전시켰다. 엘리오는 평생 주짓수의 발전을 위하여 매진하다가 2009년 1월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카를로스와 엘리오 이후 명맥이 끊길 수도 있었던 그레이시 주짓수가 전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첫째 요인은, 카를로스와 엘리오의 자식의 수가 엄청났으며 (카를로스는 21명, 엘리오는 9명) 이들 거의 대부분 주짓수의 전파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특히 엘리오의 자식들은 모두 R로 시작하는데 역사상 최강의 파이터로 인정받는 Pride 1회 우승자 힉슨 그레이시(Rickson Gracie), UFC 초대 우승자 호이스 그레이시(Royce Gracie) 등은 엘리오의 아들이다. 둘째 요인은,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는 점이다. 그레이시 패밀리는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가 이야기한 “If you can make it there, you can make it anywhere”을 염두에 두고 엘리오의 아들 호리온(Rorion)을 필두로 미국 시장을 끊임없이 공략하여 성공함으로써 전세계에 주짓수의 우수성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성공한 것이다.
기무라 마사히코 (木村政彦, 1917~1993) – 그레이시 가문과 함께 되살아난 유도의 귀신 : 그레이시 가문은 엘리오 그레이시가 불패의 파이터였다고 전설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공식 기록에서 엘리오는 두번의 패배를 기록했다. 한번은 일본의 유도 선수 출신 파이터인 기무라에게 패한 것이고 다른 한번은 제자인 산타나(Waldemar Santana)에게 패한 것이다. 산타나와의 경기는 격투기 역사상 최장 시간 경기로 기록될 정도로 치열한 경기였지만 엘리오가 패했다. 후에 카를로스의 아들인 칼슨 그레이시(Carlson Gracie)가 산타나에게 복수를 했다. 엘리오의 생애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경기는 1951년 10월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열린 기무라 마시히코와의 경기였다. 이 경기는 브라질 대통령, 부통령 모두 경기장에 와서 관람했을 정도로 화제가 된 경기였다.
기무라는 구마모토 출신으로 10살 때 유도를 시작하여 17세인 1935년 전(全)일본유도대회 최연소 우승 후 3연패, 1950년까지 13년 무패, 10연속 우승 등 엄청난 기록을 세운다. 일본 유도계에는 “기무라 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후에 기무라 없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의 고수였고 유도의 천재였다. 1950년 기무라는 강도관을 탈퇴하고 막 생겨난 프로유도에 입문한다. 하지만 빗발치는 비난 속에 프로유도는 곧 해체되고 기무라는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하게 된다. 그 와중에 기무라는 브라질을 방문, 엘리오와 경기를 갖게 된 것이다. 기무라와 함께 브라질을 방문한 동료 가토 5단이 수일 전 엘리오에게 패배하는 것을 본 기무라는 긴장감 속에서 경기에 임한다. 브라질 관중들은 경기장에 기무라의 관(棺)을 갖다 놓는 쇼까지 벌이면서 기무라의 기를 꺾으려고 한다. 하지만 경기는 기무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기무라는 몇번의 기술을 걸면서 엘리오가 정신을 잃는 것 같자 기술을 풀고 엘리오의 의식을 확인할 정도로 신사적으로 경기를 하였다. 그래도 엘리오가 항복하지 않자 ‘기무라 록’이라고 알려진 팔 비트는 기술을 걸어 엘리오의 항복을 받아내려 한다. 하지만 엘리오는 끝내 항복하지 않았고 결국 팔이 부러지는 소리가 경기장에 울렸다고 한다. 경기를 지켜보던 맏형 카를로스 그레이시가 타올을 던져 항복하고 경기가 끝난다. 그레이시 가문에서 불패(不敗)를 주장하는 것은 경기 전 “만약 엘리오가 3분 이상 견디면 내가 진 것으로 하자”는 기무라의 제안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엘리오는 기무라에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 시간 13분만에 엘리오가 참패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무라가 젊고 덩치가 커서 공평한 경기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기무라는 34세, 85킬로였고 엘리오는 42세, 63킬로그램이었다. 이 경기를 통하여 기무라 마사히코가 얼마나 뛰어난 격투기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 그가 고안한 기술인 ‘기무라 록’은 현대 격투기에서 상대방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대표적인 기술의 하나이다. 기무라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또 하나의 계기는 재일교포 레슬러 역도산과의 경기 때문이다.
기무라 마사히코와 역도산의 대결 : 195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일본 열도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바로 최강의 프로레슬러 역도산과 유도 선수 출신의 레슬러 기무라 마사히코의 경기가 도쿄 국기관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이 경기는 ‘제2의 간류지마의 결투’라고 불리울 정도로 일본 국민들의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간류지마(嚴流島)의 결투’란 사상 최강의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와 검의 귀신 ‘사사키 고지로(佐佐木小次郞)’의 1612년의 결투를 말하는데 역도산과 기무라의 결전이 그만큼 치열한 경기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경기는 싱겁게 끝난다. 역도산이 무력한 기무라를 마구 때려 실신시켜버린 것이다. 유튜브의 영상으로 이 충격적인 경기를 볼 수 있다. 기무라가 실신하자 링사이드에서 역도산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가라데의 최배달이었다. 타격을 하지 않기로 한 경기 전의 약속을 어기고 역도산이 기무라를 가격하여 실신시킨 데 대해서 최배달이 역도산을 죽이겠다고 달려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현장에서 역도산과 최배달이 부딪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천하의 기무라가 왜 아무런 기술을 쓰지 않고 일방적으로 맞으면서 이렇게 무력하게 패한 것일까?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경기는 사전에 무승부로 끝내기로 담합을 한 경기였다고 한다. 총 세 번의 경기를 하기로 담합하고 사전에 날인한 약정서를 교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경기 도중 기무라가 실수로 역도산의 사타구니를 가격하자 약이 오른 역도산이 타격기로 마구 가격하여 기무라를 실신시킨 것이다. 이 경기 후 일본 각지에서 비겁한 역도산을 응징하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동경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겁이 난 역도산은 엽총을 곁에 놓고 제자들이 경비를 서게 하고 잠을 잤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정식 무도인인 기무라가 쇼(show)적인 요소가 강한 프로레슬링에 몸을 담그고 또 역도산과 사전 담합을 하게 된 것일까? 바로 사랑하는 아내 때문이었다. 아내가 결핵에 걸려 비싼 약값(스트렙토마이신)을 마련해야 했던 기무라로서는 프로레슬링 외에는 돈을 벌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며칠 후 역도산은 기무라의 복수가 두려워 경기 후 추가로 돈을 보냈고 기무라도 없는 일로 하는데 합의했다고 한다. 어쨌건 기무라의 아내는 완쾌되었고 기무라는 자신이 프로레슬링에 몸을 담그면서 역도산의 반칙으로 실신되는 치욕을 겪은 데 대해서 일말의 후회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은퇴 후 말년의 기무라 선생의 얼굴에는 평안함과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고 한다.
1997년 Pride 1회 대회에서 힉슨 그레이시가 일본의 영웅 다카다 노부히코를 제압하고 난 이후 그레이시 패밀리의 주짓수가 전세계를 휩쓸게 되자 엘리오를 완벽하게 꺾었던 일본 역사상 최강의 파이터 기무라 마사히코는 새삼스레 존경과 각광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