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경청, 명쾌한 설명... 환자 속까지 ‘시원’
“이비인후과와 이목구비에서 ‘귀 이(耳)’가 가장 먼저 나오는 까닭이 무엇일까?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주대병원 이비인후과의 정연훈 교수(50)는 스승인 고 박기현 전 아주대의료원장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담고 환자의 말을 경청한다. 특히 어지럼증 환자 가운데 우울증이 심한 환자의 말은 끝까지 들으려고 애쓴다. 어떤 환자는 진료실에서 눈물 한 바가지를 쏟으며 가슴 속 이야기를 토해 놓고는 진료실을 나선다. “선생님이 정신과 의사보다 나아요”라면서 미소를 지으며... 더러 환자의 고충을 듣다 보면 간호사가 대기환자 리스트가 쌓이는 것에 안절부절 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진료실 문을 열고 말한다. “환자들이 너무 많이...”
눈물 쏟으며 속내 털어놓은 환자 “정신과 의사보다 나아요”
그래도 이비인후과의 간호사들은 정 교수를 좋아한다. 정 교수가 수많은 환자들의 짐을 벗겨주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식구들도 칭찬을 받곤 한다. 정 교수는 환자들에게 △정직하게 진료하기 △과잉진료 하지 않기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일로 두 번 오지 않게 하기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귀는 해부학적으로 복잡하고 병의 원인이 모호한 경우가 많지만, 정 교수는 명쾌하게 설명한다. 환자들은 답을 얻었다며 좋아한다.
정 교수는 치과의사 출신의 귀 전문 의사다. 그는 1983년 당시 ‘신흥명문’이었던 대원고(현재 대원외고)를 수석 졸업한 수재였지만 학력고사 3개월 전부터 급성간염을 앓아 평소 점수를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서울대 의대 진학이 어렵자 ‘반수’를 각오하고 일단 서울대 치대에 들어갔지만 예과 1학년 때 치과의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서울대 치대 교수가 되려는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데 ‘돌발 상황’이 생겼다. 치대 졸업 무렵 10살 터울인 큰 형(정필훈 전 서울대 치대학장)이 교수로 부임한 것.
형제가 같은 학교 교수가 되려면 남들의 ‘태클’을 넘을 수 있는 무기가 있어야 했다. 형이 아우에게 ‘복수 자격증’에 대해 귀띔해줬다. 유럽에서는 인후두경부 질환을 보는 치과의사들 가운데 의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아우는 1988년 대우그룹의 지원으로 개교한 아주대의대가 편입제도를 도입하자 지체 없이 원서를 넣었고, 지체 없이 합격증을 받았다. 정 교수는 아주대 의대를 수석졸업하고 서울대 치대로 금의환향하려고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대의대가 ‘미래의 대표선수’를 그냥 보낼 리가 없었다. 박기현 박홍준 교수 등 스승들이 말리자 “그럼 인턴만 마치고 결정하겠다”며 짐을 풀었다. 그리고 인턴, 전공의, 전임의를 거쳐 교수를 하면서 다시 짐을 싸지 않고 있다.
서울의 대학병원들과 승부 위해 연구 매진... 특허도 11건 출원
정 교수는 치과의사의 경험을 살려 인후두경부 외과에서 실력을 발휘하려고 칼을 갈았지만,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스승 박기현 교수가 “귀 분야의 교수가 필요한데 적임자를 찾아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맡게”라면서 떠안겨 치과와 가장 거리가 먼 귀 분야에 터를 닦아야만 했다.
정 교수는 아주대병원 이비인후과를 대한민국 최고 병원으로 성장시키려면 자신이 연구에 매진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지방병원이 서울의 대학병원과 당장 수술건수와 희귀 케이스 등으로 경쟁할 수는 없지만 연구를 바탕으로 한 진료에서는 승부를 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스승들이 연구실 시스템을 갖춰 놓았고, 정 교수는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청각세포 간 신호전달 체계를 밝히고 고막, 귀뼈, 귓바퀴 등의 인공조직을 개발하는 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금까지 매년 10편 안팎의 SCI 논문을 발표했으며 난청을 예방하는 천연물과 인공고막 등에 대한 특허를 11건 출원해서 5개를 등록했다. 매년 연구과제 1, 2개가 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2002년 전임의 때 쓴 박사학위 논문이 대한이비인후과학회 석당우수논문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2013년 제1회 글로벌 이과학 연구 포럼 최우수상, 2015년 유럽이비인후과학회 최우수 포스터 상 등 숱한 상을 받았다.
이석 식별법 등 다양한 진단-치료법 개발, 국제 기준 만들어
정 교수는 진단과 치료에서 국제 기준을 만든 의사이기도 하다.
2003년 어린이에게도 어지럼증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 《국제소아이비인후과지》에 발표한 논문은 다른 나라 의사들이 논문을 쓸 때 참조한다. 2006년 이석증 환자의 고개를 숙였다 치올린 다음 눈동자의 방향을 보고 돌이 어디에 있는지 간단히 식별하는 진단법을 고안해서 《후두경》에 발표했다. 이 방법은 ‘정의 진단법(Chung’s Tes)’으로 이름 붙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 의사들도 이석증 환자 진단에 쓰고 있다.
정 교수는 2004년 돌발성 난청 환자의 고막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놓아 치료하는 법을 개발해 《후두경》 지에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귓바퀴에 혈종이 생긴 환자에게 연골의 피를 뽑고나서 치과에서 잇몸 본을 뜨듯, 귓바퀴의 본으로 고정시키는 치료법을 개발했다. 치과의 치료법을 귀 치료에 응용해서 수술 없이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는 귀 기형 환자의 귀에 치과 임플란트 치료처럼 임플란트를 심은 뒤 실리콘 소재의 인조 귀를 씌우는 방법을 국내 도입해서 보급하고 있다.
“귀는 해부구조가 복잡하고 세포와 조직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적성이 맞는 분야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난청과 귀 기형 등에서 많은 진전이 이뤄졌지만 일반인에게 덜 알려진 점도 극복해야 합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듣는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치아에서 귀로 방향을 튼 것은 참 잘한 결정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