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스승이 만든 당뇨병 대가 “치료법 정답은 없다”
서울대병원 교수사진첩을 훑어보면 유독 1978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교수가 많다. 권준수(정신과), 김효수(순환기내과), 박경수(내분비내과), 박노현(산부인과), 서경석(간담췌외과), 양한광(위장관외과), 오창완(신경외과·분당), 윤성수(혈액종양내과), 조상헌(알레르기내과), 전종관(산부인과), 정진호(피부과), 한호성(외과·분당)...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교수들이다. 이들은 본과 1학년인 1980년 5공화국의 휴교령 탓으로 한동안 학교 밖에서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공부해야만 했다. 산전수전 겪으며 공부해서 지금 서울대병원과 대한민국 의학계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박경수 교수는 이 막강한 동기들 사이에서 수석 졸업했다. 의대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진료봉사 동아리에서 빈민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하면서도, 시험기간에 도서관에서 성적과 관계없는 책을 탐독해 친구들로부터 “너 뭐하냐?”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최우등 졸업했다. 현재 국제학계가 인정하는 당뇨병 분야의 대가가 된 데에는 천재성을 빼놓을 수가 없겠지만, 정작 본인은 “다섯 명의 스승 덕분”이라면서 “당뇨병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더욱 많아져 고민”이라고 말한다.
박 교수의 첫 번째 스승은 고(故) 지제근 교수. 박 교수는 본과 2학년 때 지 교수의 [신경과학] 수업을 듣고 매료됐다. ‘의학계의 멋진 신사’ 지 교수는 겨울방학 때 ‘똑똑한 제자’를 불러 《행동신경학》이란 책을 건네줬다. 박 교수는 지교수의 병리학 실험실에서 겨울방학을 보내며 무뇌증 10 증례를 분석해 무뇌증의 뇌 형태 10가지를 분석해 《서울대 의대 학술지》에 발표했다. 박 교수가 내과와 신경과 사이에서 고민할 때 스승은 “아직은 한국에서 신경과를 전공하기에는 이르다”면서 “신경과를 제대로 파려면 군의관 다녀와서 미국 가서 해야 할 것”이라고 길을 정해줬다.
두 번째 스승은 고(故) 고창순 교수. 박 교수가 내과 전공의 신참일 때 직접 불러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JM)에서 신경전달 물질의 중요성을 캔 논문을 복사해줬다. 또 ‘정신의학, 면역학, 내분비학의 뿌리는 하나’라는 주제의 책을 권하면서 “내분비학을 평생의 전공으로 삼는 것이 어떨까?”하고 제안했다.
세 번째 스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민헌기 교수(87). 박 교수가 내분비학에 관심을 기울일 때 “자네, 내분비학을 하려면 생화학 공부를 깊이 해야 하네”라며 구체적 길을 제시했다. 또 “한국인 당뇨병 환자는 서양 환자가 다른가?”라는 평생의 화두를 던져 주었다.
2009년 서울대병원을 정년퇴임하고 을지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이홍규 교수(71)는 숱한 아이디어의 보고(寶庫)였다. 이 교수는 한국인을 비롯해서 동양인에게 미토콘드리아 DNA가 돌연변이해서 당뇨병이 나타난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이 당뇨병은 모계 유전되며 마른 사람에게서도 잘 나타나고 청력이 떨어지는 특징이 있다. 이 교수는 또 환경오염물질이 당뇨병을 일으킨다는 것도 밝혔다. 박 교수는 이 교수와 함께 그 해결책을 찾아왔다. 2013년 미토콘드리아 DNA 돌연변이를 세포 차원에서 규명해서 《사이언스 신호》지에 발표했으며 치료법의 임상시험을 계획 중에 있다. 국내 당뇨병 학계에서는 “이 교수가 씨를 뿌리고 박 교수가 수확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당뇨병학회 회장을 지낸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의 로버트 헨리 교수도 박 교수의 연구에 길을 터 준 스승이다. 박 교수는 왜 인슐린의 기능이 떨어지는지 메커니즘을 연구하기 위해 헨리 교수의 문하로 들어갔다. 헨리 교수는 연구열정으로 똘똘 뭉친 동양인 제자에게 홀딱 반했다. 박 교수는 빛나는 눈으로 연구실에 살다시피 해서 ‘PPAR 감마 활성제’가 당뇨병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규명, 《당뇨병》 지 등 무려 10개의 학술지에 발표했다. 헨리 교수는 제자가 귀국한 뒤 실험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비와 시약을 보내기도 했다. 헨리 교수가 다른 제자들에게 박 교수에 대해서 얼마나 이야기 했는지, 다른 제자들은 박 교수를 학회에서 만나면 “네가 그 박경수냐?”고 알은체를 할 정도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250여 편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일본 밀레니엄 프로젝트 팀과 공동연구해서 아시아인의 새 당뇨병 유전자를 규명한 《네이처 제네틱스》 논문, 홍콩 중문대와 함께 연구해 아시아 당뇨병 환자에게만 작용하는 유전자들의 기능을 밝혀 《당뇨병》 지에 발표한 논문 등은 세계 각국의 학자들이 즐겨 인용한다. 해마다 우리나라 의사와 일본, 중국, 홍콩, 싱가포르 등의 의사 300여명이 당뇨병에 대해서 토론하는 국제학회를 만들어 이끌어오고 있다.
“당뇨병은 아직 모르는 게 많습니다. 학생 때 사실로 받아들였던 내용이 가설에 불과하다고 알 때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의사들이 겸허히 공부하면서 환자를 대해야 합니다.”
박 교수는 당뇨병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990년대만 해도 의학계에서는 당뇨병의 합병증을 예방하려면 혈당 조절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혈당 조절이 당뇨병 환자의 지상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환자 군에게는 무리한 혈당 조절이 심장병 발병 위험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헌기 교수가 던진 화두, 한국인 당뇨병 환자에게 맞는 치료법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박 교수는 2000년 보건복지부 ‘당뇨 및 내분비질환 유전체 연구센터’의 리더로서 10년에 걸쳐 한국인 당뇨병 환자의 유전적 원인을 연구했다.
“당뇨병의 원인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혈당 조절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혈당만 조절한다고 수명이 길어지거나 합병증이 줄지는 않습니다. 당뇨병의 원인에 따른 맞춤 치료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박 교수는 당뇨병 치료에 있어서 의료진과 환자의 커뮤니케이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의료진은 의사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 검사실의 간호사와 임상병리사, 교육실의 당뇨병교육 전담 간호사와 영양사, 심리상담사 등이 힘을 합쳐 환자를 봐야 한다는 것. 신장내과, 정형외과, 심장내과 등 동료의사들과의 협업도 중요하다.
그는 “국내에선 의사가 환자 진료에 충분한 시간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 늘 안타깝다”면서도 교육간호사와 영양사 등의 면담 기록을 늘 체크해서 빈틈을 메우려고 노력한다. 박 교수가 “환자에게 ‘좋아하는 커피 좀 줄이셔야겠다’고 말하면 환자가 놀라기도 한다.
박 교수는 혈당조절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은 꼭 보호자를 동반해서 진료실에 들어오게 한다. 가족이 식사, 운동을 함께 하고 약 복용에 관심을 기울여야 치료 성과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환자 맞춤형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전력하고 있지만, 지금도 의료진과 가족이 힘을 합치면 당뇨병 합병증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소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