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걸린 혈우병 환자들 눈에 밟혀…"
‘에이즈 집단감염 사건’ 조영걸 교수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돈도 지식도 힘도 없는 혈우병 환자들이 거대 제약회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리한 것이다. 환자들은 생명을 위해 혈액응고제를
투여했다가 어이없게도 에이즈에 걸린 환자들이다.
지난달 29일 대법원은 “녹십자홀딩스의 혈액응고제와 일부 혈우병 환자의 에이즈
감염 사이에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시하고 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되돌려
보냈다. 제약사가 승소한 2심 판결을 뒤엎고 환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2003년
손해배상 소송이 시작된 지 8년 여 만의 일이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수많은 환자들이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사회에서는 관심 밖이었다.
환자들은 무슨 수로 이 같은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있었을까? 에이즈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기초의학자 한 사람의 열정과 연구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울산대 의대
미생물학 교실의 조영걸(50) 교수. 혈우병 환자의 에이즈 감염 의혹을 처음부터 발견,
추적, 연구, 입증한 인물이다. 녹십자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전세금과 자동차를
가압류 당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과학적 증거’를 완성시켜 나간 연구자다.
이 사건의 발단부터 대법원 판결까지 전 과정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기도 하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29일 서울아산병원 조영걸 교수를 만나 이 사건의 경위와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들어보았다. 그는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다. 억울한 환자들의
눈물과 한숨, 그 동안의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듯했다. 조 교수는 “우리 사회에
아직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입을 열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혈우병 환자들의 에이즈 집단감염 사건을 간단히 정리해주시지요.
1990년 말 이전에 에이즈 환자 2명의 혈액 중 혈장성분이 매혈을 통해 녹십자에
각각 83차례와 21차례 제공됐습니다. 이를 원료로 제조된 혈액응고제를 맞은 혈우병
환자 122명 중 20명이 에이즈에 걸린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환자 8명과 12명이 각기 문제의 혈액제공자 1명씩과 뚜렷하게 공통되는
유전자 염기서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이 사실은 국제학술지에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대법원에 제출되었습니다.
-에이즈 바이러스를 포함해 바이러스라는 게 계속 돌연변이를 하기 때문에
여러 해가 지난 뒤 공통점을 확인하기가 어렵지 않은가요?
혈액제공자 2명과 이 때문에 감염된 혈우병 환자 20명을 포함해 당시 진단받은
에이즈 환자 대부분의 혈청샘플을 보관하고 있어 가능했습니다. 이번에 대법원에
제출한 논문들은 진단 후 2~3년 이내에 얻은 혈청에서 증폭한 바이러스 유전자를
분석한 것입니다. 과거 고등법원에 제출했던 말초혈액단핵구로부터 얻은 자료보다
바이러스의 변이가 훨씬 적게 일어난 시기의 것입니다.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만한 수준의 증거입니다. 이전의 논문에서는 결론에 ‘confirm(확인했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번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에서는 국내에서 제조된
응고인자와의 연관성에 대해 ‘confirm’했다고 밝혔습니다.
-1990년 대 초 공중보건의 근무 시절부터 이 사건을 추적하셨지요?
1990년 4월부터 3년간 국립보건원 AIDS과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했습니다. 전국의
에이즈 환자를 만나 상담하고 6개월마다 혈액을 채취해 검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90년 1명을 포함하여 91년 중반부터 혈우병 환자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92년 초부터는 몇 명씩 무더기로 발견돼 당국에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저 역시 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1991년 녹십자의 혈우재단이 출범해서 혈우클리닉에 등록할
때는 AIDS 검사에서 음성판정을 받았는데 녹십자의 혈액응고제제 ‘훽나인’을 맞고
난 이후 검사를 해보니 양성판정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성 접촉이
없는 미성년자였습니다. 이 때부터 원인 규명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일선 현장에
있었던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20대 말에 현장에서 가지게 된 의문을 포기하지 않고
추적해 나이 50에 이르러서야 정답을 얻은 셈입니다. 진실로 무엇을 이루기를 원하면
온 세상이 도와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녹십자로부터 개인적으로 손해배상 소송도 당하셨지요?
2001년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이듬해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우수논문상을
받았습니다. 해당 논문에 녹십자 혈액제제로 인한 혈우병 환자의 에이즈 감염을 언급한
부분이 있었지요. 여기에 관심을 가진 동아사이언스 신동호 기자의 요청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신 기자는 이를 근거로 5개월간 현장 취재를 마친 뒤 9월 동아일보에 머리기사를
썼습니다. 그러자 2002년 10월 녹십자에서 명예훼손이라며 저를 상대로 10억 원의
손배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이후 2003년 KBS추적 60분 인터뷰가
방영되었다고 5억 원이 추가됐습니다. 저는 전세금과 자동차까지 가압류 당했으며
1심에서 패소했습니다. 당시 녹십자 측에서 제가 더 이상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면
소를 취하하겠다고 요청해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울산대 의대 동료교수들의
한결 같은 지지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고법에서 패소한 녹십자가 대법원에
상고했는데 그 상고에 대한 답변서 초고를 직접 써준 교수도 있었습니다. 사건을
맡았던 전현희 변호사는 제가 반드시 항소해야 정의가 산다며 인지대도 받지 않고
2심 소송을 진행해 주었습니다. 이 사건과 이후의 혈우병 환자 소송에서 전현희 변호사(현
민주당 국회의원)는 세승의 현두륜 변호사와 함께 무료에 가까운 변호사비를 받으며
헌신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저는 현 변호사의 성실한 변론 덕분에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승소해 2008년에야 짐을 벗었습니다.
-신동호 기자의 보도가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군요.
언론의 힘과 중요성을 실감한 사건이었습니다. 에이즈까지 감염된 혈우병 환자들은
정서적 상처와 당국에 대한 불신이 매우 큽니다. 예컨대 20명의 혈우병 에이즈 환자
중 10명은 의사인 나를 만나주지도 않는 등 진단 당시에 대단히 비협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신기자의 보도가 나간 뒤 태도가 확 달라졌습니다. '조영걸 교수는
환자 편'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덕분에 문제의 10명을 일일이 만나
채혈하여 연구를 구체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신 기자는 이후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하는
수고를 기꺼이 해주었습니다. 지금은 회사를 그만두고 보도자료 전문 인터넷언론인
뉴스와이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혈우병 환자의 소송 사건은 1심 승소, 2심 패소, 3심 승소로 이어졌는데요.
2003년 생존 환자 18명 중 16명과 그 가족이 녹십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혈우병 환자 및 가족 모임인 코헴회가 도왔지요. 감염의 학문적, 인과적 근거는 제가
제시했습니다. 2심에서는 모든 변론 기일에 참석해 증언하고 논문자료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도 2008년 고등법원에서 패소했습니다. 녹십자가 고등법원 부장판사에서 갓
퇴임한 전관(前官)을 비롯해 거물급 변호사를 대거 동원했다지만 정말 뜻밖의 결과였습니다.
대법원에서 소송이 진행되는 3년여 동안 이 사건의 과학적 이해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2건의 중요한 논문을 추가로 국제 학회지에 발표했습니다. RNA를 DNA로 변형(역전사)한
뒤 이를 증폭하는 첨단기법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에이즈 진단 후 2~3년 이내에
채혈된 혈청을 분석한 것이지요. 작년 크리스마스엔 A4용지 20여 장에 이르는 제
논문을 종일 한글로 번역해서 대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유전자 검사의 과학적인
증거는 판사라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임의로 배척할 수 없다”는 2007년 대법원 판례를
믿었습니다. 그 밖에는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번 사건과 관련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판결이 어떻게 나오는지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의 ‘fact(사실)’를
문과 출신 법관들이 제대로 이해하는 지, 즉 이과와 문과가 제대로 소통이 되는 지가
관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 희망을 심어준 대법관님들과 재판연구관님들께 이 기회에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사실, 이번에 혹시라도 패소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대법원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시위해주겠다는
동료 교수도 있었고요.
-대법원에 제출한 경과보고서에서 자신이 정암(靜庵) 조광조의 가문이라고
강조하셨는데...
정암 선생이 저희 가문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근래에는 ‘지조론’으로 유명한
동탁 조지훈 선생이 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신 분들, 일제 때 독립운동으로 15년 형을 받고 10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8촌 할아버지(조박용)도 계십니다. 어릴 때 경북 영양의 산골 고향에서 이런 어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자랐습니다. 혈우병 환자들의 에이즈 감염사건을 대하는 저의
태도는 여기서 생긴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입증하는 것이 ‘이 시대의 독립운동’이라고까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제가 직접 관련되는 사건에서 혈우병 환자들이 억울하게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좌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에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는 사람’이란
표현이 있는데 환자들이 바로 여기 해당합니다. 재판 진행 도중 교회에서 만난 부장
판사님 한 분은 “초심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셨는데 무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조교수는= 1987년 한양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생물학교실 조교를 거쳐
1990~1993년 국립보건원 AIDS과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했다. 1991년 에이즈 환자의
피를 뽑은 주사 바늘에 찔리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AIDS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제 학술지에 에이즈 바이러스와 관련한 논문을 20편 발표한 전문가다. 93년부터
울산대 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97∼98년 에이즈 생백신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하버드의대 로널드 데스로지에 교수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해 국내 에이즈 바이러스의
유전자 지도를 처음으로 밝혔다. 홍삼이 에이즈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를 진행
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