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요양병원… 고 송해 선생의 경우

[김용의 헬스앤]

고 송해 선생이 생전에 기자가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지하철 종로 3가역 5번 출구 앞 자신의 흉상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인은 이후에도 주민들의 잇단 사진 촬영 요청에 미소 지으며 일일이 응했다. [사진=김 용 기자]

이달 말 49재를 앞둔 고 송해 선생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서울 종로구 낙원동 ‘송해 길’이다. 고인의 흉상이 있는 지하철 종로 3가역 5번 출구 앞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선 지금도 선생의 친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생전에 인근 실버영화관(구 허리우드극장)에서 공연했던 영상이 하루 종일 나온다. 조화는 더 늘었다. 고인이 무료로 ‘허가’한 주변 음식점의 송해 캐리커처도 그대로다.

지난달 8일 별세한 선생은 전날(7일)까지 낙원동 ‘원로 연예인 상록회’ 사무실에 출근했다. 인근 식당에서 청국장 백반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지하철로 귀가(강남구 도곡동)한 다음날 아침 목욕탕에서 쓰러졌다. 선생이 100세를 넘기지 못해 아쉬움이 크지만 97세(1925년생)까지 건강수명(건강하게 장수)을 누린 것은 축복이다. 호적 나이(95세-1927년생)보다 실제로는 두 살 더 많다고 생전에 밝힌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건강 비결로 걷게 되는 대중교통 이용을 거론한다. 이른바 ‘BMW'(Bus, Metro, Walking)다. 매일 아침, 저녁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다리의 근력을 키웠다고 한다. 장수 노인들이 자주 말하는 몸을 자주 움직이기, 음식 조절, 낙천적 생활 등을 실천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사람들과의 교류다. 나이 들어 느끼는 고독, 외로움은 건강의 적이다. 노인의 우울감이 높아지면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다.

선생은 이런 고독, 우울감이 몸에 스며들 여지를 주지 않은 것 같다. 고인은 주말에도 낙원동에 자주 나와 사람들과 어울렸다. 2018년 부인(고 석옥이·1934~2018)이 폐렴으로 별세한 후에는 토, 일요일에도 ‘출근’이 잦았다. 노인들을 위한 공연이 열리는 실버영화관 객석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무대로 불려나가 노래 2~3곡을 부르곤 했다. 관객 중에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90대 중반 노인이 ‘후배 노인들’을 위해 노래봉사를 한 것이다.

지하철 종로 3가역 5번 출구 앞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선 지금도 송해 선생의 친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생전에 인근 실버영화관(구 허리우드극장)에서 공연했던 영상이다. [사진=김 용 기자]
그는 2000원(최근 2500원으로 인상) 우거지 국밥집, 5000원 이발관 등을 자주 찾으며 주민들과 대화를 즐겼다. 그가 낙원동 주변을 거닐면 상인들은 “송해 선생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선생님”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나이도 많지만 그만큼 존경을 받았다는 의미다. “요즘 어렵죠? 우리 힘들 냅시다!” 그의 덕담 한마디는 상인들에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청량제였다.

그가 개인 돈으로 운영한 원로 연예인 사무실은 70~80대 퇴역 연예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이 곳에서 노래 가사를 외우고 바둑, 장기를 두며 두뇌 활동을 했다. 90대 노인이 노래 몇 곡을 불러도 가사를 까먹지 않은 것은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애착이 남달랐던 ‘전국노래자랑’의 대본도 겉표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외우고 또 외웠다. 무서운 ‘치매’가 들어설 공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송해 선생이 97세까지 건강을 유지한 것은 사람들과의 활발한 교류도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질병관리청은 건강, 특히 치매 예방을 위해 노인에게도 외부 활동을 권유하고 있다. 사회활동, 취미모임 등 사람들과 어울려야 두뇌 활동을 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시간이 줄어든다. 치매를 불러오는 우울증 위험이 감소해 건강수명에 도움이 된다.

종로 3가 낙원동 ‘송해 길’에 마련된 추모 공간의 송해 캐리커처와 조화들. 수많은 조화는 정리해서 명패만 남겨 둔 것이 많다. [사진=김 용 기자]
노인들이 가장 외로움을 느끼는 공간이 요양병원-시설이라고 한다. 거동이 불편해 장기간 병상에서 누워 지내는 환자를 상상해보자. 코로나19 유행 중에는 가족 면회도 쉽지 않았다. 혼자서 통증을 견디며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불성실한 간병인을 만나면 마음고생이 더해진다. 가족 면회 때면 두터운 유리 벽 사이로 간신히 얼굴만 봐야 했다. 이들은 피붙이의 체온이 그리웠다. 손이라도 잡고 싶었다. 입원 환자들의 간청으로 지난 5월부터 가족 간 대면 면회를 할 수 있게 됐다.

나이 들면 “자다가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오랜 투병으로 자식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이치다. 송해 선생은 자식들에게 간병 부담을 지우지 않은 좋은 아버지였다. 타고난 것도 있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치매, 뇌졸중(뇌경색-뇌출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말에도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도곡역에서 종로 3가역을 왕복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시간만 나면 외우는 수백 곡의 노래 가사는 그의 뇌를 젊게 했다.

송해 선생은 별세 정치인들이 주 대상인 ‘국민장’ ‘사회장’ 못지 않은 영예를 누리고 있다. 지금도 지하철 종로 3가역 송해 길의 추모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달 말에는 실버영화관(구 허리우드극장)에서 고인의 49재 행사가 열린다. 종로 3가역 추모 공간은 이달 말까지 운영한다. 송해 선생의 명복을 다시 빈다.

    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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