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형은 주름살 심해? 공중파의 턱없는 ‘혹세무민’

[기자 수첩] KBS의 ‘B형 혈액형과 피부 주름’ 보도 유감

혹시 ‘A형은 소심하다’, ‘B형은 다혈질이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B형은 피부 주름이 더 잘 생긴다’는 주장에도 혹할지 모른다.

최근 한 공중파(KBS)는 ‘B형 혈액형은 피부 주름이 더 잘 생긴다’고 주장하는 정진호 서울대학교병원 피부과 교수팀의 연구를 소개했다.

정진호 교수팀은 서로 다른 혈액형을 가진 66~84세의 여성 99명(A형 29명, B형 26명, O형 31명, AB형 13명)의 눈주름 깊이와 얼굴 피부색을 측정했다. 연구팀은 “주름 거칠기, 주름 깊이, 멜라닌 생성 지수 등에서 B형 피험자가 가장 높은 평균값을 보였다”며 B형이 다른 혈액형보다 평균적으로 눈주름이 심하고 깊게 팰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설계부터 해석까지 엉터리인 혹세무민 연구였다.

혈액형이라는 미신, 주름까지 결정하나?

우리나라에는 ‘혈액형 심리학’이라는 특이한 미신이 존재한다. 혈액형과 어떤 성격적 특정이 서로 관련된다는 속설은 한국, 일본 등 일부 동아시아 나라에서 유행하는 대표적인 유사 과학(Pseudoscience, 擬似科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과학적 근거와 관계없는 재미있는 읽을거리로 혈액형 심리학을 소비한다.

어떤 사람은 “99명 피험자를 조사한 결과 혈액형과 주름 사이의 어떤 연관성이 발견됐다”는 연구팀의 주장이 우리가 평소 생각지 못한 가능성을 짚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의료 기관의 승인을 받은 임상 연구이고, 연구팀의 결론이 ‘모든 B형이 주름이 잘 생긴다’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황승식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역학 전공)는 “해당 연구는 인과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임상 시험이 아니라 사람을 대상으로 한 관찰 연구”라고 한계를 지적했다. “특정 혈액형이 피부 주름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검증하려면 나이, 성별, 피부 상태 등이 동일하지만 혈액형만 다른 피험자를 모아 놓고 주름 상태 변화를 측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황승식 교수는 “위와 같은 가설을 입증하려면 나이, 성별, 피부 상태가 서로 비슷하고 혈액형만 다른 피험자 99명이 특정 부위에 일정 기간 자외선을 쬐었을 때 혈액형에 따라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야 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해당 연구는 나이가 제각각인 여성의 주름 깊이와 피부색 등만 관찰했다. 애초부터 가설을 입증할 수 있는 연구 설계가 아니었던 셈이다.

황승식 교수는 “ABO 혈액형 구분에 언급되는 항원이 피부 조직의 항원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런 설명도 없었다.

정부 과제, 국제 학술지? 권위라는 포장지

정진호 교수팀의 주장을 소개한 공중파 매체는 해당 논문(Deeper Wrinkle Formation and Less Melanin Production in Aged Korean Women with B Blood Type)이 보건복지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피부과학 국제 학술지(Annals of Dermatology)’ 최신호에 실린 권위 있는 연구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실 관계가 틀렸다.

정진호 교수팀이 논문에서 언급한 보건 당국의 지원은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관리하는 ‘글로벌 코스메틱 연구 개발 사업단’ 과제다. 이경구 글로벌 코스메틱 연구개발 사업단 평가관리팀장은 “정진호 교수팀은 지난 2010~2013년 사이 국내 화장품 대기업과 함께 혈액형 항원과 당전이 효소를 이용한 신개념 화장품 개발 과제에 참여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경구 팀장은 “‘피부과학 국제 학술지’에 실린 이번 연구는 과거 연구팀이 수행한 과제와 관련 있는 주제일 뿐, 사업단의 직접적인 연구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게다가 해당 논문은 학술지의 ‘오리지널 아티클(Original Article)’ 란이 아닌 ‘브리프 리포트(Brief Report)’ 란에 수록됐다. ‘피부과학 국제 학술지’를 발간하는 대한피부과학회 측은 “브리프 리포트에는 피부과 영역의 연구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간략히 기술한 논문을 소개한다”고 전했다. 동료 심사를 받은 정식 논문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이번에 공중파가 소개한 정진호 교수팀의 연구는 설계와 해석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건복지부의 지원을 받은 정식 논문의 결과도 아니었다. 이런 연구를 두 차례나 소개한 공중파 보도는 포털 사이트에서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많은 독자를 만났다. 시민의 시청료로 운영되는 공중파가 “혈액형 어쩌고” 하는 이런 혹세무민하는 엉터리 연구를 소개하는 현실. 씁쓸하다.

[사진=Syda Productions/shutterstock]

    맹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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