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엔 미혼을 범죄 취급?

[김원회의 性인류학] 조선시대의 결혼장려책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고 온갖 복의 근원이다. 비록 지극히 친하고 가깝지만, 또한 지극히 바르고 삼가야 하는 자리이다(夫婦 人倫之始 萬福之原 雖至親至密 而亦至正至謹之地).’

퇴계 이황이 손자 이안도(李安道)의 혼례 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조선의 성리학을 대표하던 학자의 결혼과 부부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혼기를 지났는데도 결혼을 못한 노총각을 ‘광부(曠夫)’, 노처녀를 ‘원녀(怨女)’라고 했다. 광부는 집에 들어가 봐야 아무도 없으니 공허하고 허전한 남자라는 뜻이고, 원녀는 시집 못간 여자는 그 원한이 하늘을 찌른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장가나 시집 못간 노총각, 노처녀들은 고아나 홀아비, 과부 등과 함께 반드시 구제해 줘야 할 대상이었다. 늦게까지 장가나 시집을 못가면 ‘떠꺼머리총각’ 또는 ‘떠꺼머리처녀’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성인이 되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사고와 중매결혼 풍습, 나아가 과도한 혼수로 인한 폐습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가 차도록 결혼하지 않는 것은 죄악(罪惡)처럼 인식됐고 그 책임은 관(官)에까지 미쳤다. 집안에서도 ‘불효 중의 불효’로 인정받았고, 특히 후손이 없는 것은 가장 큰 불효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남자의 나이 15, 여자의 나이 14가 되면 혼인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되어 있지만, 혼인 연령에 대한 강제적 규정은 없었고 보통 여자는 14~20세에 혼인하는데, 대체로 신랑이 두어 살 정도 어린 경우가 많았다. 원나라에 공녀로 뽑히지 않으려고 10살 정도만 되어도 시집을 보내던 풍습이 남아 조선 초기엔 이런 심한 조혼이 많았지만 차차 달라졌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조혼(早婚) 특히 신부 측의 조혼이 생활고, 노동력의 획득 등과 맞물리면서 조선조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조혼에 따른 폐단 또한 한둘이 아니었는데, 심한 경우 시아버지와의 불륜도 있었고, 극단적인 경우 ‘부부살해’ 즉 색시가 신랑을 죽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지 않은데도 서른이 넘도록 시집보내지 않으면 그 집 가장을 죄인으로 다스리기도 했다. 가난해서 결혼을 못하는 노총각과 노처녀가 있으면 그곳 수령이 왕에게 혼수 비용을 청구하기도 했다. 정부로부터 문책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조는 “혼기를 넘긴 처녀 총각을 조사하여 2년마다 한번 씩 결혼시키도록 하라”며 미혼남녀들을 구제해 주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성종 때에는 전국의 25살이 넘도록 시집못간 처녀들을 조사하여 만약 집안이 가난하면 쌀이나 콩을 주어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지금은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는 풍조까지 있는데, 만약 정부가 결혼을 장려하겠다고 하면 경제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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