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지식인들이 벌거벗고 소를 탄 사연

명정(酩酊). 술 취할 명에 술 취할 정이 붙었으니, 술내가 진동하는 낱말이네요. 술 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는 냄새를 우리말로 ‘문뱃내’라고 하는데 문뱃내가 코를 찌르는, 순우리말 ‘고주망태’에 어울리는 단어이지요.

고주망태는 술에 몹시 취해서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모주망태는 늘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대중없이 마시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고주망태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수필집 ‘명정 40년’으로 묶어낸 문학가가 있었지요. ‘논개’라는 시로도 유명한 수주(樹州) 변영로입니다. 1897년 오늘 태어난 천하의 술꾼, 주선, 모주망태이지요.

그는 일제 말 ‘술 권하는 사회’에서 6, 7세 때부터 술에 취해서 살았습니다. 술집에서 3.1독립운동 민족대표였던 변절 친일파 최린의 바둑판을 엎은 일화는 유명하지요. 술기운이 날아갈까 봐 술을 마시고 전철을 타면 문과 뚝 떨어진 구석자리에서 코를 막고 숨죽인 채 있었을 정도로 술을 사랑했지요.

‘명정 40년’의 압권은 ‘나체 사건’입니다. 오상순, 이관구, 염상섭이 혜화동 수주의 집에 놀러왔습니다. 주머니에 돈은 있었지만, 주선들을 충족시킬 자신이 없었던 수주는 동아일보 송진우 편집국장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서 ‘기가 막힌 원고를 쓰겠다’며 원고료를 받아냅니다.

이 돈으로 소주와 고기안주를 사서 성균관 뒤 사발정 약수터로 올라갑니다. 문인들은 음풍농월 속에서 술을 즐기다가 소나기를 맞습니다. 옷이 흠뻑 젖자 돌연 오상순이 “자연으로 돌아가자”며 옷을 벗어 찢었습니다. 모두 알몸으로 춤을 추면서 술에 빠지던 순간, 누군가 언덕 소나무에 묶인 소들을 보고는 함께 타고 도심으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우리는 몸에 일사불착(一絲不着, 실오라기 하나 없음)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리고 똘물(소나기로 해서 갑자기 생겼던)을 건너고 공자를 모신 성균관을 지나서 큰 거리까지 진출하였다가 큰 봉변 끝에 장도(-시중까지 오려던)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명정 40년’ 55쪽)

‘명정 40년’은 애주가들의 눈으로 보면 때론 배꼽 잡고 웃고, 때론 미소 지으며 엔도르핀을 생산할 수 있는 책이지요. 그러나 술에 흠뻑 젖어 길에서 잠들거나 다쳐서 귀가하기 일쑤인 그를 바라보는 가족의 아픔은 어떠했을까요?

수주의 표현대로라면 첫날밤도 치르기 전에 ‘흥숭망숭’ 대취해 비틀 걸음을 치며 처갓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첫날밤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고 했습니다. 털이 주뼛주뼛 선다는 뜻이지요. 그는 ‘신부의 낙망은 어떠하였을 것이며 그 집 일가의 경악은 어떠하였을 것인가. 나는 거의 새벽이 되도록 신부의 옷을 벗길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아아, 슬프다, 되걸을 수 없는 인생의 길이여’라고 한탄의 글을 썼습니다.

수주는 결국에는 실패했지만, 금주를 선언합니다. 금주 패(牌)까지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술자리에선 패를 상에 올려놓고 잔을 받지 않겠다고 버텼지요.

이런 삶만 보면 수주는 ‘막걸리 같은 토종’으로만 보이지만, 사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산호세 캠퍼스에서 유학한 천재 영문학자랍니다. 동아일보 기자, ‘신가정(여성동아의 전신)’ 주간, ‘신민공론’ 주필 등을 지낸 언론인이자 이화여전 강사, 성균관대 교수,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 등을 지낸 교육자였습니다.

지금 수주처럼 술을 마시면, 병원이나 구치소에 가겠지요. 술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수 백 배나 많아질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지요. 그러나 그때, 그 낭만과 멋이 부러운 것 또한 사실이네요. 술, 적당히 멋있게 즐길 수 있으면 최고의 보약일 텐데….

나는 술 몇 단?

또 다른 술꾼 지훈 조동탁은 술을 마실 때의 주격(酒格)을 중시했습니다. 여러분의 술자리는 품격과 낭만이 넘치겠지요. 조지훈은 술을 마시는 데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도 18단계’에서 여러분은 몇 단에 속하나요?

◯부주(不酒)=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9급
◯외주(畏酒)=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8급
◯민주(憫酒)=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7급
◯은주(隱酒)=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6급
◯상주(商酒)=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5급
◯색주(色酒)=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4급
◯수주(睡酒)=잠이 안와서 술을 먹는 사람-3급
◯반주(飯酒)=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2급
◯학주(學酒)=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酒卒)-1급
◯애주(愛酒)=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초단
◯기주(嗜酒)=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酒客)-2단
◯탐주(耽酒)=술의 진경(眞境)을 체득한 사람(酒境)-3단
◯폭주(暴酒)=주도(酒道)를 수련(修練)하는 사람-4단
◯장주(長酒)=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酒仙)-5단
◯석주(惜酒)=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酒賢)-6단
◯낙주(樂酒)=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酒聖)-7단
◯관주(觀酒)=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酒宗)-8단
◯폐주(廢酒)=열반주(涅槃酒),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9단

오늘의 음악

술과 관계있는 노래들을 준비했습니다. 첫 곡은 교과서이자 고전이지요.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를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친구들이 부릅니다. 둘째 곡은 씬 리지의 멋진 노래입니다. ‘Whisky in the Jar.’ 마지막 노래는 1970~80년대 20대 초반 젊은이에게 술자리의 애국가 같았던 노래입니다. 최백호의 ‘입영전야’입니다. 오늘은 보너스가 하나 더! 어제 터진 추신수의 끝내기 홈런 화면 보시면서 엔도르핀을 충전하는 것은 어떨까요?

♫ 축배의 노래 [루치아노 파바로티 외] [듣기]
♫ Whisky in the Jar [씬 리지] [듣기]
♫ 입영전야 [최백호] [듣기]
♫ 추신수 끝내기 홈런 [신시내티 Vs 애틀란타] [듣기]

댓글을 달아주세요.

귀하의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