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환자가 진료실밖에서 손잡고

[이성주의 건강편지]백혈병의 날

의사와 환자가 진료실밖에서 손잡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한 마음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전문

완연한 가을입니다. ‘장미의 시인’ 릴케의 ‘가을날’이 어울리는, 하늬바람 솔솔 부는 가을입니다.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려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사인은 백혈병입니다.

백혈병은 한 때 애절한 병이었습니다. ‘러브 스토리’ ‘라스트 콘서트’ ‘사랑의 스잔나’ ‘가을동화’ 등에서 이 병에 걸린 여주인공은 속절없이 안타까운 사랑을 접어야 했습니다. 영화에서 예쁜 백혈병 환자가 많은 것은 백혈병에 걸리면 조혈모세포(혈액줄기세포)가 적혈구를 제대로 못 만들어 얼굴이 창백해 보이곤 하기 때문입니다.

암은 크게 혈액과 림프계에 생기는 ‘혈액암’과 특정 장기에 생기는 ‘고형암’으로 양분되는데, 지금까지 암 정복의 역사는 혈액암 분야가 이끌어왔습니다. 혈액암은 고형암과 달리 혈액을 뽑아 쉽게 병의 진행 과정을 볼 수 있고 약물 반응을 빨리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각종 실험에 유리하기 때문이지요.

백혈병은 1970년대 골수이식이 등장하면서 ‘완치 가능한 암’이 됐습니다. 백혈병 가운데 30~60대 성인이 잘 걸리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CML)은 2001년 ‘표적 항암제’ 글리벡이 시판되면서부터 약으로 치료되는 병이 됐습니다. 그러나 상당수 환자가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거나 정기 진단을 게을리 해서 병을 키우거나 재발한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CML 연구와 진료를 주도하고 있는 서울성모병원 가톨릭암병원과 백혈병 환자들의 등산모임 ‘루산우회’ 회원들이 환자의 완치율을 높이기 위해 ‘CML의 날’을 만들었습니다. 그날이 오늘, 9월 22일입니다. 인체에서 9번, 22번 염색체가 고장 나면 이 병이 생긴다는 데 착안했다고 합니다. 올해는 국내에서 첫 행사를 벌이지만 내년부터는 아시아 전역에서 펼쳐진다고 합니다.

의사와 환자가 진료실 밖에서 손을 맞잡고 환자들을 도우려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CML의 날’ 제정에 중추 역할을 한 서울성모병원 김동욱 교수뿐 아니라 서울대병원 노동영, 아주대병원 전미선, 한양대병원 배상철 교수 등 제가 아는 수많은 의사들이 진료실 밖에서 환자들을 보듬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이 번져가고, 그 사랑이 많은 사람을 살리기를 빕니다.

가을하늘이 시리도록 파랗습니다. 이 나무, 저 나무로 불며 잎들에게 생기를 북돋아주는 갈바람처럼, 살랑살랑, 파란 희망과 사랑이 퍼져가기를 기도합니다.

백혈병에 대한 상식


○백혈병은 희귀병?=흔한 병도 아니지만 희귀병도 아니다. 국내에서 환자가 1만5000~2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백혈병은 불치병?=아니다 60~80%가 치료된다. 특히 만성골수성백혈병(CML)은 좋은 약이 많이 나와서 약 복용 만으로도 ‘관리가 가능한 병’으로 바뀌고 있다. 국내에서도 일양약품이 차세대 백혈병 치료제 ‘라도티닙’을 개발,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20여 개 대형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백혈병의 증세는?=급성백혈병은 초기부터 얼굴이 창백해지거나 잇몸이 붓는 증세, 고열, 피로감, 빈혈, 멍, 복통, 구역질, 구토 등이 나타난다. 만성백혈병은 초기에는 별 증상이 없다가 병이 진행되면 급성백혈병과 비슷한 증세가 나타난다.
○백혈병은 유전병?=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원인이지만 유전병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방사능 노출, 중금속 오염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요즘에는 흡연이 원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부모가 담배를 피우면 자녀에게서 백혈병이 생길 위험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제 454호 건강편지 ‘장미의 시인’ 참조>

오늘의 음악

오늘은 백혈병과 관련한 음악 몇 곡을 준비했습니다.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을 이긴 스페인의 테너 호세 카레라스가 푸치니의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을 부릅니다. 절창이란 이런 것이구나,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진추하와 아비가 부르는 ‘사랑의 스잔나’ 주제가 ‘One Summer Night’, 앤디 윌리엄스가 부르는 ‘러브 스토리’ 주제가 ‘Where Do I Begin?’, 스텔비오 치프리아니가 작곡한, 영화 ‘라스트 콘서트’ 주제곡 ‘스텔라에게 바치는 콘체르토’가 이어집니다.

♫ 별은 빛나건만 [호세 카레라스] [듣기]
♫ One Summer Night [진추하 & 아비] [듣기]
♫ Where Do I Begin? [앤디 윌리엄스] [듣기]
♫ 스텔라에게 바치는 콘체르토 [스텔리오 치프리아니] [듣기]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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