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인 듯 살았던 문호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곽재구의 ‘은행나무’ 전문>

 

어제 가족과 관악산으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산기슭의 단풍도 아름다웠지만, 서울대 정문 앞의 은행나무 길이 만추(晩秋)의 시정(詩情)을 불러오더군요.

 

은행나무는 서울 가로수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나무입니다. 요즘 일부 식물 전문가들이 서울에 은행나무가 너무 많은데다 냄새가 역겹다며 은행나무를 다른 수목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은행나무의 향기까지 사랑합니다.

아시다시피 은행나무는 역사가 2억년 이상인 ‘살아있는 화석’이며 암수가 다른데다 독특한 모양의 침엽수입니다. 은행나무는 공해를 정화하는 효과가 뛰어나고 열매와 잎은 혈액순환과 혈압강화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하지요?

 

곽재구의 시에서 늙은 러시아 문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가리킵니다. 마침 은행나무가 잎을 우수수 떨어뜨리는 어제는 그의 186번째 탄생일이었습니다. 그는 1845년 24세 때 《가난한 사람들》로 러시아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지만 4년 뒤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됩니다.

 

그는 기껏해야 유배 정도를 생각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 ‘만약 신의 가호가 있어 살수가 있다면 1초라도 낭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죽음을 기다리다가 총살 직전 기적과 같이 황제의 감형을 받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5㎏의 쇠고랑을 차고 유배생활을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소설을 쓴 뒤 모조리 외웠다고 합니다. 그는 유배생활이 끝나고 군복무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해서 머릿속의 작품을 쓰고 또 씁니다. 아내의 죽음과 재혼, 출판사의 파산 등의 굴곡을 거쳤지만 《죄와 벌》《백치》 《악령》《카라마조프의 형제들》등 인류의 대작을 잇따라 내놓습니다.

 

주위의 지인이 그가 감옥에서 보냈던 시기를 애석하게 여길 때마다 그는 오히려 화를 내고 미친 듯한 속도로 집필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매일을 죽음을 앞둔 날처럼 지냈습니다. 자신이 너무 편해지고 나태해진다고 느끼면 카지노로 가서 돈을 모두 탕진하고 ‘사지’(死地)로 되돌아왔다고 합니다.

 

오늘을 마치 삶이 며칠 남지 않은 것처럼 살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의 현자 루시우스 세네카는
“사람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했습니다.
은행나무가 마지막 잎들을 떨어뜨리고 있는 오늘, 마치 삶의 마지막인 듯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도스토예프스키 밑줄 긋기

○인간이 불행한 것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 그것을 자각한 사람은 곧 행복해진다. 일순간에. 

 

○인생, 일단 이 커다란 술잔에 입을 댄 이상,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셔버리기 전엔 결코 입을 떼지 않겠다.

 

○거침없이 남을 비난하기 전, 먼저 자신을 살리는 법부터 찾아야 한다. 

 

○괴로움이야말로 인생이다. 인생에 괴로움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또한 만족을 얻을 것인가?

 

○돈은 모든 불평등을 평등하게 만든다.

 

○돈이 있어도 이상(理想)이 없는 사람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만약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인간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분명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도록 악마를 만들었을 것이다.

 

○많은 불행은, 난처한 일과 말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일 때문에 생긴다.

 

○인간의 그 강한 생명력! 인간은 어떠한 것에도 곧 익숙해지는 동물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최상의 정의다.

 

 

오늘의 음악

[오늘(11월 12일)은 근대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로댕의 탄생일이기도 합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로댕 곁에서 비서 역할을 하고나선 “나는 영감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로댕은 매일 혼신의 힘을 다해 노동함으로써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지옥의 문》《칼레의 시민》《발자크 상》《키스》등 로댕의 작품을 감상해보시죠.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쇼팽의 야상곡(녹턴) 작품 9의 2번만 들으셔도 마음의 건강에 좋을 듯합니다]

  • 로댕의 작품 감상하기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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