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급사하면 대부분 복상사? 아니면?

[김영훈의 참의사 찐병원] 브루가다 증후군과 돌연사

심정지 돌연사는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 남성에게 흔히 나타난다. 한국과 일본에서도 돌연사가 자주 발생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96년 미국 LA의 시더스사이나이 병원에서 부정맥을 연구할 때 스페인 출신의 형제 의사 페드로 브루가다와 조세프 브루가다를 만났다.

형제는 1989년 심정지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환자의 병을 연구해 1992년 심실부정맥(다형성 심실빈맥, 심실세동)이 발생하는 원인을 규명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데, 갑작스러운 심장 정지로 발생한 돌연사를 생각하면 된다. 이후 이러한 증상에 ‘브루가다 증후군(Brugada Syndrom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는 조세프를 통해 브루가다 증후군을 자세히 알게 됐고 진단법 및 치료, 체내 전기 충격기 삽입의 효과 등을 전해 들었다.

심정지 돌연사는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 남자들에게서 특히 발생 빈도가 높다. 중국은 드물고, 한국과 일본에서도 돌연사가 자주 발생 한다. 우리나라는 2020년 기준 3만여 명이 돌연사한다고 집계됐는데 대부분 심정지이다. 하루 약 80명이 심정지 돌연사를 하는 셈이므로 매우 높은 수치라 하겠다. 심장병이 있는 사람은 통계적으로 돌연사 가능성이 50%나 된다. 이는 나이와 관계없다. 심장병을 지닌 사람이 돌연사할지, 자연사할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의학이 발전해 지금은 가족 중에 급사자가 있으면 유전자 검사를 받고 미리 돌연사를 예방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동남아에선 밤에 자다가 돌연사하는 일이 빈번해 복상사(腹上死. Death during consensual sex)로 오해받곤 하는데, 사실은 갑작스러운 심정지가 대부분이다. 예전에는 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웠기에, 또 복상사라고 말하기 껄끄러워 ‘신이 데려갔다’라고 여기며 체념하는 때가 많았다.

브루가다 증후군은 유전적 원인이 적지 않으며 가슴 두근거림, 호흡 곤란, 심실세동, 심실부정맥, 돌연사, 실신, 어지러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심실세동(Ventricular fibrillation, 心室細動)은 심실이 무질서하고 불규칙적으로 1분에 350~600회 수축하는 상태이다. 정상적 심장 수축 기능이 사라지기에 즉시 전기에너지를 가하는 응급조치(제세동)를 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른다. 우리나라 공공장소에 제세동기(Defibrillator, 除細動器)가 설치된 것은 이러한 환자가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즉각 조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1998년 미국에서 돌아와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우리나라에도 브루가다 증후군 환자가 분명 있을 텐데 어떻게 발견하고 어떻게 시술할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진찰실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을 때 인턴 한 명이 환자의 심전도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내 뒤에 서 있는 레지던트에게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주 이상한 부정맥 심전도가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게 뭔지…….”

“무언데?” 등 뒤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고개를 돌려 그 심전도를 살펴보았다.

“이 환자 지금 어디에 있나요?”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갑시다.”

환자는 40대 중반의 남자였으며 새벽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와 이런저런 조처를 한 상태였다. 검진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전형적 브루가다 증후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몸속에 심장 충격기를 넣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 번째는 불편하다는 이유였고, 두 번째는 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였다. 그때 심장 충격기는 미국 제품이었는데 가격이 3000만 원이나 되는 고가였다. 넉넉하지 못했던 그는 돈이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나는 최대한으로 가격을 조정해 2000만 원까지 내려 주도록 충격기 수입 회사 및 병원과 합의를 보았다. 내가 보증을 서고 비용은 매달 할부로 갚아 나가도록 했다.

마침내 국내 최초로 브루가다 증후군 환자에게 심장 충격기 삽입 수술이 시행됐고, 성공리에 마쳤다. 건강하게 퇴원한 그는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었으나 돈을 전혀 갚지 않았다. 원무과와 수입 회사는 이제 나를 압박했다. 내가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러던 10개월 후에 그의 심장 충격기에 이상 신호가 나타났고, 그는 다급하게 병원을 찾았다. 병원의 조처에 따라 그는 다시 건강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만약 심장 충격기가 없었다면 그는 사망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돈을 조금씩 갚아 나갔다. 심장 충격기 덕분에 생명을 지킬 수 있었기에 돈을 갚은 것이다.

심장은 생명과 직결되는 장기이다. 심장이 건강한 사람에게 생기는 1차성 부정맥은 대부분 생명에 지장이 없는 양성 부정맥이다. 그러나 100% 안심할 수는 없다. 심장에 이상이 없는데 갑자기 부정맥으로 사망했다면 유전적 이유가 크다.

우리나라 전체 심전도 검사자의 0.9%에서 브루가다 증후군을 의심할 만한 결과가 나오는데, 이 가운데 약 10%인 0.09%만 부정맥을 일으킨다. 따라서 가족 중에 급사한 사람이 있으며, 심장병이 없는데도 부정맥이 있다면 유전자 검사를 권유한다. 브루가다 증후군의 약 30%가 유전자 이상 소견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이유 없이 졸도한 경험이 있다면 정밀 검사를 받고, 재발 방지를 위해 철저히 치료해야 한다.

브루가다 증후군을 발견하고 치료법을 개발한 조세프 브루가다는 필자의 초청으로 2002년 방한해 강연하기도 했다. 심정지로 생기는 돌연사를 예방하기 위해 많은 의사들에게 브루가다 증후군 경각심을 일깨워 준 것이 큰 소득이었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 그를 만나 브루가다 증후군의 치료와 시술 방법을 배운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당시 선진국에서 의술을 배우는 것은 감은 눈을 뜨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해외로 나가 선진 문물을 배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중요하다. 눈을 뜨지 않으면 새 질병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선결과제가 있다. 우선 투입되는 비용 문제다. 국력의 차이도 있지만, 미국 국립보건원과 우리나라 국립보건연구원 예산은 비교가 어려울 정도이다. 미국 NlH는 연구원 1만8000여 명이 75개 빌딩에서 일한다. 1년 예산은 약 35조 원이다. 그러니 2023년 5월 현재 15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인력이나 예산이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질병 연구에 그만큼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이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제도적 문제도 걸림돌이다. 새로운 질병 치료기법을 개발했는데도 신의료 기술로 인증을 받고 심사평가원의 보험 급여 여부 결정에 이르는 시간은 평균 5~6년이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폐쇄적이라는 의미이다. 질병 연구 예산의 확대, 연구 열의 확대와 더불어 제도 개선도 시급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사의 마인드이다.

원인 불명 질병, 치료 불가능 질병은 여전히 많다. 반면 한국 사람들이 치료법을 발견해 낸 질병의 숫자가 극히 적다. 새로운 시각과 마인드로 접근하는 것이 최선이다.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어렵고, 치명적 질병이 인간을 괴롭히고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정부와 국민의 의식과 행동도 개선돼야 하지만 의료진의 깨달음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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