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잘못 없어도 배상하라는 법, 누가 왜 만들었나?

[박문일의 생명여행] (49)분만 의료사고의 국가배상제도 필요

임산부들이 건강한 아기를 출산한 뒤, 온 가족이 같이 즐거워하는 행복한 모습에 산부인과 의사들도 같이 기뻐하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필자가 산부인과를 선택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임신부들은 환자가 아니라는 착각 때문이었다. 의사가 환자가 아닌 사람을 진료하는 것 자체가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긴 진통을 겪은 임산부들이 건강한 아기를 출산한 뒤, 온 가족이 같이 즐거워하는 행복한 모습에 산부인과 의사들도 같이 기뻐하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 이런 일은 대학병원 전공의 시절의 짧은 단상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문의가 되면서 산부인과의 어렵고 고단한 실상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헤쳐나와야 했기때문이다.

#1: 임신성고혈압 임산부

임신성고혈압은 과거 임신중독증으로 불리던 질환이다. 원래 고혈압이 있거나 임신 중기 이후에 혈압이 올라가면서 단백뇨가 생기고 온몸이 붓는다. 특히 혈압이 많이 올라가면 여러 합병증이 생긴다. 예를 들면 소변이 줄어들고 머리나 윗배가 아프며 눈앞이 잘 안 보이기도 한다. 혈소판 감소, 간 기능 저하, 콩팥 기능 악화, 폐부종도 합병증의 하나다.  또 뱃속 아기가 잘 안 자라고, 심하면 사망하기도 한다.

필자가 분만을 담당한 임신성고혈압 임부가 있었다. 혈압 조절이 잘 안돼 분만 예정일 약 4주 전에 유도분만이 필요했다. 분만은 순탄하게 진행됐고, 조산했지만 아기는 건강했다. 그런데 분만 후 몇 시간 지나서 산모가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무사한 분만에  감사해했던 보호자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산모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니 무슨 일이냐”, “시력을 잃는 것이냐”, “잘못 분만시킨 것이 아니냐”, “의사가 책임져라” 는 등의 항의를 했다. 산모의 친정 오빠는 “몇 시간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는 설명도 무시하고 필자를 때릴 듯 덤벼들었다.

모든 것이 산모가 가지고 있던 고혈압 때문이었고, 눈이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현상도 망막 뒤에 생겼던 일시적인 부종 때문이었다. 물론 산모는 예상대로 다음 날 아침 시력이 원상태로 회복됐다. 임산부와 가족들은 아무런 사과도 없이 도망치듯 퇴원했다.

#2: 뇌전증 임산부

뇌전증이 있는 여성이 임신하는 경우가 1000건 중 3건이다. 다행히 임신이 간질 발작의 위험을 높이지는 않는다. 또한 이 질환이 있는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대부분 건강에 전혀 이상이 없다. 실제로 임신과 간질을 함께 경험하는 여성의 최대 96%가 합병증 없이 정상적으로 출산한다. 그렇지만 환자는 뇌전증을 다루기 위해서 약을 먹어야 한다. 이 약들을 임신 중에 복용하면 기형아 발생 위험을 높이기 때문에 임신 중에는 약물 종류를 신중하게 변경해야 할 필요도 있다. 또한 약물 복용량도 줄인다. 따라서 스트레스가 많을 수밖에 없는 분만 과정에서 간혹 경련이 있을 수 있다. 경련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면 분만 중에도 항경련제를 투여해 미리 경련을 막는 조치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필자가 담당한 한 임부에게 뇌전증이 있음을 분만 뒤 알게 됐다. 임신부가 자신의 병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산모의 분만 과정은 순탄했다. 그런데 분만 뒤 갑자기 경련과 함께 입에서는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산모의 남편과 친정 아버지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분만을 시켰길래 저렇게 딸이 경련을 하느냐”, “곧 큰일이 벌어지지 않겠느냐”, “책임져라” 등 큰소리로 분만실이 떠나가라 극렬하게 따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친정 아버지와 달리 친정 어머니의 조용한 모습에 필자는 곧 사태를 짐작했다.

친정 어머니는 딸의 뇌전증을 남편에게도 숨겼고 사위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모녀만이 비밀을 간직한 채 계속 약을 복용해온 것이었다. 임신 중에 의사에게 알리지도 않고 스스로 약 복용량을 줄였다가 분만 뒤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인 것은 산모가 분만 후 발작 증세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약 분만 중 발작이 있었다면 일시적 무산소 상태가 돼 임산부도 태아도 큰 위험이 생겼을 것이다. 이 가족들도 분만 다음 날 소리 없이 퇴원했다.

#3. 양수색전증 임산부

양수색전증은 분만 진통 후기 또는 출산 뒤 발열 없이 갑자기 경련, 심폐 기능의 정지, 혈관내 응고 및 이로 인한 대량 출혈과 같은 증상이 발생하는 질환이다. 그 원인은 진통 중 압력이 올라간 자궁 내에서 양수가 자궁 혈관으로 유입된 뒤 운이 없게도 폐, 심장 또는 뇌혈관으로 이동하여 해당 혈관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마치 고혈압 환자에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뇌경색, 심근경색증 같은 현상이 임신 중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 양수색전증은 모든 임산부 2만 명 중 1명에서 발생하는 불가항력적 질환이다. 양수색전증이 일어나면 사망할 확률이 86%에 육박하며, 산모 사망 원인의 1/4을 차지하는 무서운 병이다.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임산부 가족에게 얘기해도 대부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임신부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병이 임신 과정에서 악화한 경우,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숨긴 경우,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질환 등 위에 위에선 세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 밖에도 산부인과 의사들은 임신과 분만과 관련된 진료에서 어처구니없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많다.

여성이 아기를 출산하는 환경은 항상 긴장의 연속이다. 그 결과가 좋아야만 정상이고, 결과가 좋지않으면 우선 의사 탓을 하는 의료문화행태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의사도 국민의 일원이 아닌가. 모든 국민은 억울하지 않을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산부인과에서 분만 관련 사고, 다시 말하면 분만실의 의사가 충분히 의무를 다했어도 의료사고가 생겼을 때 의사의 무과실이 입증되더라도 배상액의 30%는 의료기관에서 부담해야 한다. 의료계의 꾸준한 노력 끝에 부담금을 10%로 하향 조정하는 법안이 추진 중이지만, 의료계는 이 10% 부담도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국가배상책임을 100% 인정하는 법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궁금하다. 우리나라 정책입안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과실 의료인에게 책임을 묻는 정책을 밀어붙였던 것일까? 우리나라 어떤 국민이 자기가 1%의 잘못도 없는 것에 대한 책임을 1%라도 지려고 할까?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간단히 풀릴 일을 그동안 정부는 의료계에 법으로 강제해온 것이다. 그야말로 원칙적이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은 법 집행이었다. 늦게라도 원칙과 정의에 입각한 조치가 이뤄져 ‘저출산과의 전쟁’에서 고군분투하며 생명의 탄생을 보람으로 여기는 산부인과 의사들의 사기를 꺾는 일이 사라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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