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88234의 시대, 노화는 병일까?

[박문일의 생명여행] (29)항노화(抗老化)와 향노화(向老化)

노화는 병인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학계에서 화두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요즘 친구들 부모님 부고를 받고 장례식장에 가보면, 고인이 거의 90대 또는 100세 이상이신 분들이 많다. 80대도 드물다. 고령화에 따라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수명이 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단지 오래 사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할 것이다. 오죽하면 9988234라는 말이 생겼을까? 아시다시피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 3일 만에 세상을 뜨면 좋겠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OECD 국가 중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몇 년 후인 2026년에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다. 이러한 고령화에 맞추어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건강수명 연장일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51%가 3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 몇몇 대학병원에서는 노년내과가 정식 진료과목으로 개설되어 있고 이를 전공하는 교수들이 환자를 본다. 오래전부터 소아는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기 때문에 소아청소년과라는 전문진료 영역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노인은 젊은 사람과 많이 다르며 또한 소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약물을 사용하는 것에도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노년층을 잘 이해하고 노인의료를 전담할 수 있는 노년내과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실제로 고령 환자는 몇 가지 질환을 동시에 갖고 있을 확률이 높으며, 또한 각 질병의 예후가 여러 환경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 또한 노인은 심리적·사회적 부분까지도 종합적으로 고려해 치료 효과가 감소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노인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질병 중심’ 치료가 아닌 ‘동반자적 치료’가 필요한데, 이러한 노인의 의학적 특성을 담당할 학문으로서도 노인내과 개설추세는 시의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그동안 의학계에서는 노화를 질병으로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노인내과 교수들도 일치된 의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어떤 신체 증상이 가역적(可逆的)으로 진행되면 “질병”이며 불가역적으로 진행되면 “질병이 아니다”. 즉, 노화가 질병이라면 나아서 젊음으로 회복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즉 젊음으로 회복시킬 수 없으므로 당연히 가역적이 아닌 불가역적인 진행이고 따라서 질병이 아니란 것이 그동안 의료계의 주류 의견이었다.

그런데 최근 해외 의학계에서 이런 사고를 뒤집는 의견들이 나타나고 있다. 즉, “노화도 질병”이므로 치료가 가능하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는 11번째 ‘국제질병분류’에 노화를 포함했다. 세계적으로 노화에 대한 사고를 뒤집는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유전학 교수인 데이비드 A. 싱클레어 교수가 저술한 《노화의 종말’》 내용을 살펴보자. 그는 노화는 질병이라고 선언한다. 나이 듦에 따라 모든 신체 능력이 저하되며 이에 따라 생기는 각 장기의 병리 변화는 그동안 의학계에서 지적하는 질병의 범주에 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길이 아니며, 치료될 수 있고, 치료해야 한다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싱클레어 교수는 과학자임과 동시에 헬스케어 벤처기업가이기도 하니, 아마도 과학적으로는 노화를 고쳐야 할 질병으로 인정해 노화치료에 활발한 연구 투자가 이루어지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싱클레어 교수에게 있어서 사실 노화는 치료대상이라기보다는 다만 “항노화(抗老化)”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 같다.

사람의 전생애 발달과정을 8단계 모델로 설명한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에릭 H. 에릭슨 (Erik H. Erikson)은 65세 이후의 노년기를 생애의 마지막 여덟 번째 인생 발달 단계로 구분했다. 그가 규정한 8단계(노년기, Older Adult)는 인생에서 지혜(Wisdom)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개인은 인생의 과정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즉, ‘자아 통합(Ego integrity) vs. 절망(Despair)의 단계’로서 조화와 진실을 마주하며 지혜롭게 사는가, 아니면 인생을 원망하며 사는가로 나뉜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이 65세를 넘어 92세까지 살면서 스스로 더욱 긴 노후를 겪은 뒤 자신이 주장했던 8단계 인간발달과정을 9단계로 수정하였다.

그런데 이 9단계는 바로 스웨덴 사회학 교수인 라스 톤스탐(Lars Tornstam)이 주창한, 노화에 대한 심리사회 이론인 “노년초월”의 개념이 적용된다. 그의 노년초월 이론은 노인과 노화 과정 자체의 두 가지 현상에 중점을 두면서 노년기의 경험과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노년기의 특성을 모두 설명한다. 그 후 이 이론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노년초월은 중년기 이후 노년기에 접어든 개인이 “인생의 전반적인 시각을 물질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보다 우주적이고 초월적인 시각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긴 노년기에 이른 에릭 H. 에릭슨은 말년에 노년초월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노년초월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했다. “노년초월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향해 가장 깊이 있고 의미 있게 대화할 수 있는 예술이고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에 관련되는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는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생의 위대한 춤이다.”

사실 노화가 신체적 질병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부질없다. 노화는 피할 수 없다. 다만 더 나은 노화를 준비해야 한다. “늙음에 검질기게 맞서서 대항하여 젊음을 유지하려는 항노화(抗老化)와 다르게, 해를 바라는 해바라기처럼 늙음을 향해, 기꺼이 늙음을 받아들여 슬기롭게 즐기는 자세가 향노화(向老化)다.” 라는 유형준 전 한림대 의대 내과 교수의 말이 한층 더 가슴에 와닿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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