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유행 초기, 환자 비난 정당했나?

[Dr 곽경훈의 세상보기]전염병 시대의 '조리돌림'

사진출처=게티이미지뱅크

콜레라와 장티푸스는 잊힌 전염병이다. 한때는 국가의 근간을 흔들고 전쟁의 판도를 바꿀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빈곤한 국가와 불우한 난민을 괴롭힐 뿐이다. 적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선진국’에서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심각한 유행을 일으키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인류가 콜레라와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전염병’의 위협에서 벗어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콜레라와 장티푸스의 감염경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악취를 풍기는 불결한 환경’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을 알았지만 ‘악취’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그래서 ‘나쁜 공기가 질병을 일으킨다’고 판단했다(고대와 중세에는 ‘악취’를 다양한 질병의 원인으로 판단했다. 예를 들어, 말라리아도 ‘악취’, 그러니까 ‘나쁜 공기’가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말라리아가 늪지대 주변에서 자주 발생한 사실을 토대로 전개한,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말라리아는 모기를 매개체로 삼아 전파하는 질병이며 늪지대가 모기의 서식처라 그 주변에서 자주 발생할 뿐이다).

‘역학의 아버지’란 명성을 얻은 영국의 의학자 존 스노(John Snow 1813-1858)가 ‘오염된 물이 콜레라를 일으킨다’는 주장을 펼치며 1854년 여름의 콜레라 유행을 성공적으로 통제할 때까지 헛발질만 거듭했다.

다행히 존 스노의 업적에 힘입어 19세기 후반부터 인류는 장티푸스와 콜레라 같은 ‘수인성 전염병’에 한층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의학의 발전’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다른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1906년 늦여름, 미국 뉴욕에서 6명의 장티푸스 환자가 발생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런던, 파리, 뉴욕 같은 대도시에도 상수도와 하수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그 자체가 대단한 뉴스는 아니었다. 다만 6명이 거주한 곳이 중산층 혹은 서민이 거주하는 지역이 아니라 부유한 은행가인 찰스 헨리 워렌의 저택이란 것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감염의 원인’을 찾으려는 조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덜 익은 민물조개’로 만든 요리가 원인이라 생각했으나 몇몇 환자는 해당 요리를 먹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조사는 미궁에 빠졌고 ‘감염의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조사는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돌파구는 워렌의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였다. 요리사는 워렌의 저택에서 일하기 전에도 8곳에서 음식을 담당했으며 가운데 7곳에서 장티푸스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때마다 요리사 자신은 증상이 없거나 아주 경미하게 앓고 회복했지만 통틀어 22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사망자도 있었다.

조사를 진행한 책임자는 이런 결과를 정리하여 1907년 미국의사회지(The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JAMA)에 발표했다. 미국 의료계에 최초로 ‘건강한 보균자’란 개념이 알려진 순간이었다. ‘건강한 보균자’란 인체의 면역과 세균의 힘이 기묘한 균형을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 즉, 세균이 인체를 위험에 몰아넣을 만큼 면역이 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세균을 완전히 퇴치할 만큼 면역이 강하지도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건강한 보균자’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 세균을 전파할 가능성이 있다.

의학적으로는 중요한 발견이었지만 ‘건강한 보균자’로 지목된 요리사에게는 끔찍한 경험의 시작이었다. 메리 말론(Mary Mallon)이란 이름의 그 요리사에게 대중의 관심, 특히 공포가 섞인 부정적인 관심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런 관심에 부응하고자 언론은 앞다투어 취재에 나섰고 ‘장티푸스 메리(Thypoid Mary)’란 선정적인 제목과 함께 ‘죽음을 퍼트리는 마녀’로 요리사를 묘사했다. 당국도 마찬가지였다. 보건국은 메리를 노스브라더섬에 있는 리버사이드 병원에 격리했다. 1850년대에는 천연두환자를 수용했고 1940년대 후반까지 결핵환자가 주로 입원한 리버사이드병원은 ‘치료’보다 ‘격리’에 집중하는 공간이었다. 안타깝게도 메리는 처음 리버사이드병원에 격리된 후, 잠시 풀려났던 것을 제외하면 1938년에 사망할 때까지 자유를 박탈당한 채, 격리시설에서 살았다.

그런데 메리 말론이 사망하는 1938년까지 뉴욕에서만 400명이 넘는 ‘건강한 보균자’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메리 외에도 장티푸스를 전파할 위험이 있는 사람이 뉴욕에만 최소한 400명이 있었다. 그러나 메리 말론을 제외하면 누구도 감금되지 않았다. 여성이며 이민자(메리 말론은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이다)여서 ‘사회적 약자’에 해당했고 극성스런 언론이 만든 ‘장티푸스 메리’란 꼬리표 때문에 메리 말론만 부당하게 처벌당한 셈이다.

안타깝게도 21세기에도 이런 사례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2년간 겪은 코로나19 대유행만 돌아봐도 그렇다. 대유행 초기에 ‘확진자’는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고 역학조사란 명분으로 사생활이 까발려졌다. 엄격한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온갖 비난이 뒤따랐으며 직장에서는 죄인처럼 눈치를 봐야했다.

물론 오미크론 변이의 등장과 함께 하루에도 수십만의 확진자가 발생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위험인물로 낙인찍히지도 않고 역학조사를 통해 사생활이 드러나는 상황도 없다. 규칙을 사소하게 어겨도 큰 문제가 없고, 더 이상 직장에서도 죄인처럼 눈치볼 필요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유행 초기에 확진자는 ‘주류가 미워하는 소수’에 해당했지만 이제는 ‘사악한 소수’로 낙인찍어 괴롭히기에는 확진자의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최초의 ‘건강한 보균자’인 메리 말론은 감금당했지만 이후에 밝혀진 ‘건강한 보균자’는 너무 많아 아무도 감금당하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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