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비통의 유통기한은 1년?” (연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비통(grief)과 애도(mourning)는 구별된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그에 대한 슬픔을 표하는 것이 비통이라면 애도는 내적 슬픔에 잠겨 있는 상태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은 보통은 ‘비통’이 애도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미국에서 이 ‘비통’의 유통기한이 공식적으로 설정됐다. 미국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 5판(DSM-5)’의 최신 매뉴얼에 비통의 기간이 1년이 넘으면 정신장애로 진단하고 치료해야 한다는 내용이 추가됐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번 결정은 비통을 정신질환으로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10년 넘은 논쟁의 종식을 뜻하며 1년 넘게 지속되는 비통에 대한 심리치료와 약물치료 비용을 보험상 정식으로 청구 가능해짐을 뜻한다. 또한 1년 이상 지속되는 비통을 치료하기 위한 연구에 대한 자금줄이 트이게 됐다. 현재 비통 중독 증세에 대한 치료제인 ‘날트렉손(naltrexone)’이 임상시험 단계에 있는데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기 위해 이 같은 치료제가 길게 줄을 설 것임을 말한다.

1990년대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극심한 비통을 정신질환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유족의 슬픔과 고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강고했기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인간경험의 근본적 측면을 병적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다며 반대한 목소리가 더 컸던 것.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는 슬픔의 감정을 제약회사들의 새로운 시장으로 던져줘선 안 된다는 거부감도 컸다.

그럼에도 DSM-5 개정안에 장기 지속되는 비통이 정신장애로 규정된 데에는 홀리 G 프리거슨 웨일 코넬 의학대학원 교수(정신역학)와 콜롬비아대의 캐서린 시어 교수(정신의학)의 연구가 큰 몫을 했다. 프리거슨 박사는 1990년대부터 비통의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항우울증제를 처방하다가 딜레마에 빠졌다. 항우울증제가 약효를 발휘하긴 했지만 그들이 느끼는 극심한 슬픔은 우울증 증세인 ‘우울함과 불안감’과 달랐다. 그 감정은 ‘그리움과 애착, 갈망’이며 그냥 놔둘 경우 고혈압과 자살 상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뚜렷했다.

프리거슨 교수의 통계 조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가까운 사람이 사망한 뒤 사람들이 비통함을 느끼는 기간은 6개월이다. 하지만 4%로 추정되는 이상 징후 집단은 억울하고 비참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보다 오랜 기간 감정과 기능, 수면 장애를 겪게 된다.

이런 프리거슨의 연구를 토대로 미국정신의학회(APA)는 2010년 장기 비통을 우울증의 하나로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과잉진단과 과잉치료에 빌미를 제공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면서 무산됐다. 이런 교착상태를 돌파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 시어 교수의 연구였다.

시어 교수는 비통의 슬픔이 우울증보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트라우마) 같은 스트레스 장애와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는 트라우마 심리치료법을 원용해 장기 비통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16주간의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2016년까지 임상시험의 데이터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은 항우울제 처방 같은 다른 우울증 치료법보다 월등한 효과를 발휘했다. DSM-5 개정안 운영위원회의 폴 S 아펠바움 위원장은 시어 교수의 연구결과가 “개정안에 새로운 진단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고 말했다.

아벨바움 위원장은 2019년 프리거슨 교수와 시어 교수를 포함한 소위원회를 구성해 정상적 비통과 정신장애 수준의 비통을 구별하는 기준에 합의했다. 프리거슨과 시어 교수는 원래 사별 후 6개월까지가 그 기준이 돼야한다고 봤다.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전체의 4%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적 반발을 피하기 위해 그 기간을 2배 더 확장하자는 APA의 보수적 ‘간청’을 받아들였다. 프리거슨 교수는 이에 대해 슬픔을 정신질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을 설득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지만 현명한 선택이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오랫동안 극심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맞춤형 치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온 사람들은 DSM-5 개정을 환영했다. 버지니아 커먼웰스대의 케네스 S 켄들러 교수(정신의학)는 이를 미국천문학회 행성위원회가 행성에 대한 규정을 토대로 태양계 행성에서 명왕성을 추방했던 결정에 비견하며 “비통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에겐 복음과 같은 뉴스”라고 말했다.

한건필 기자 hanguru@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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