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샤넬 백을 불 태운다면?

[소아크론병 명의 최연호의 통찰] 쓸 데 없는 일의 필요

꽤 늦은 겨울 밤 10시, 청담동 명품 거리 샤넬 매장 앞에서 작은 텐트 하나를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 추운 날 길거리 위에 웬 텐트야?’ 의문은 동반자의 설명으로 바로 해소됐다. 명품백을 제값에 사서 나중에 재판매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단다. 수요는 많은데 워낙 공급이 부족하다 보니 아침 일찍부터 매장 앞에는 번호표를 받으려는 대기줄이 길게 늘어서고, 한 시간도 안 지나 그 날 하루 동안 매장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마감된다고 했다. 가장 먼저 들어가면 좋은 백을 미리 선점할 수 있으니 전날 밤부터 대기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살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재판매용 전략으로 밤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지만 참으로 그 사람에게는 ‘쓸 데 있는’ 아이디어였다.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다. 고생을 하면 원하는 바를 이뤄야지, 결과가 아무 것도 없게 된다면 정말 괜한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후회가 막심해진다.

우리는 그 후회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쓸 데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는 데 언제나 공을 들인다. ‘쓸 데 있는’ 일이란 모든 이들이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이라서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본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선진국과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거의 모두에게 학창시절의 목표가 된다. 경제 대국 독일도 대학 진학률이 50%대인데 우리는 80%에 이른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남 따라하다 보니 내 것이 없다. 창의는 물 건너 간다. 대학을 가지 않아도 이 세상에는 할 일도 많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될 기회도 많은데, 남들과 비슷해져야 마음이 놓이는 사회가 돼 버리니 모두가 고만고만하다.

과학적 연구를 봐도 그렇다. 사람들은 ‘쓸 데 없는’ 연구를 하는 것을 망설인다. 결과를 미리 예상해 봤을 때 본인에게 쓸데없을까 봐 그렇다. 늘 이렇게 이득과 손실을 재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을 기대하기는 점점 더 어렵다. 사실 패러다임을 바꾸는 창의적인 연구는 ‘쓸 데 있는’ 연구만 해서는 만들어 낼 수 없다. 아흔아홉 번의 ‘쓸 데 없는’ 연구를 하고 그동안 쌓였던 실수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해 낼 때 백 번째 연구는 노벨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샤넬백은 엄청나게 비싸다. 가죽 표면에 스크래치라도 나면 아마 그날 밤 한잠도 못 잘 정도로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 샤넬백에 불붙일 아이디어를 냈다면 틀림없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게다. 평화시장의 한 가죽 장인이 있어 자신이 만든 가죽백과 샤넬백 중에 어느 것이 더 튼튼한지를 보겠다면서 두 백에 불을 붙이는 말도 안되는 실험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결말은 뻔해 보이는데 당연히 두 백 모두 불에 타 재만 남을 것 같다. 그런데 장인 백의 일부가 타지 않고 남았다. ‘어 이거 뭐지?’ ‘가죽 성분인데 왜 안 탈까?’ ‘무슨 화학적 결합이 일어났나?’ 이제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가죽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의 관점 자체가 바뀌게 된다. 이렇게 엉뚱한 결과를 얻으며 새로움은 시작되는 법이다. 남들이 볼 때 정말로 ‘쓸 데 없는’ 비교 연구지만 여기서 노벨상이 탄생한다.

남 따라하기만 해서는 결코 일등하지 못한다. 매우 단순한 진리인데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저지르지 못하고 주저한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대부분인 부모에게는 ‘쓸 데 있는’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대학을 가지 않고도 ‘쓸 데 없는’ 일을 하다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샤넬백에 불을 붙이는 무모함은 밤 새워 줄서서 구입한 샤넬백을 재판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쓸 데 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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