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위기돌파, 공공병원이 해결책?

[Dr 곽경훈의 세상보기]공공병원 절대선론의 위험

역사를 돌아보면 모든 사회적 문제의 책임을 ‘인간의 사악한 성향’에 돌리는 주장을 펼친 적이 종종 있다. 그렇게 개인적인 수준의 ‘선과 악’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행위는 단순하고 명쾌해서 손쉽게 적지 않은 지지를 모을 수 있다. 또, 몇 가지 조건만 갖추면 군중을 효율적으로 선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한계가 명확해서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층 헝클어버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의 크고 작은 병폐의 원인으로 ‘일본지배의 잔재’를 지목하여 ‘토착왜구를 척살하라’고 부르짖는 행위는 짧은 시간에 추종자를 모아 강력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으나 그뿐이다. 소위 ‘정신승리’라 부르는 벅찬 감동 외에 실제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거의 없다.

청나라 말기의 의화단 운동도 마찬가지다. 서양오랑캐에 맞서 중국을 지키자는 선동은 순식간에 많은 추종자를 모았고 외국인을 살해하고 약탈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에는 중국에 한층 불리한 상황만 초래했을 뿐이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병폐를 정말 해결하려면 케케묵은 ‘토착왜구 척살’을 외칠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구조적 단점과 장점을 파악해서 차근차근 냉철하게 접근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서양인을 살해하고 약탈하며 ‘서양귀신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으로는 청나라 말기의 혼란을 통제할 수 없었다. 정말 중국을 위한다면 냉철하게 쇠락한 청나라가 지닌 문제를 직시하고 고통스러워도 자기반성에 근거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한 대책도 마찬가지다. ‘정의로운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몇몇 의료계 인사는 2년 전, 대유행이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민간병원이 만악의 근원이다’, ‘돈에 눈이 먼 의사들의 탐욕이 대유행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공공병원만 만들면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외친다.

실제로 ‘자본주의 의료제도의 절정’, ‘영리병원의 천국’인 미국은 코로나19 대유행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상의료의 대명사’인 ‘NHS’를 자랑하는 영국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또, 정말 한국의 의료제도가 코로나19 대유행에 맞서 실패했는지도 의문스럽다.

‘소수의 공공병원이 영웅적으로 싸우는 동안, 민간병원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비분강개하는 그들의 주장이 과연 사실일까? 민간병원이 정말 ‘수익이 나는 환자’를 받으려고 코로나19 환자를 외면한다면 그걸 증명할 명확하고 구체적인 통계라도 제시해야하지 않을까?

자신의 몇몇 경험담을 증거로 제시하는 행위는 ‘부끄러운 술책’에 불과하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10년 넘게 응급의학과 의사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공공병원이 중환자에게 제공하는 의료의 수준이 매우 의문스럽다’, ‘어쩔 수없는 상황이 아니면 공공병원에 중환자를 보내고 싶지 않다’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흥미로운 사례’를 구성할 수 있다.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의료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의료제도는 많은 단점에도 ‘탁월한 의료접근성’,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양질의 의료’ 같은 장점이 있다. 물론 의사의 희생이 그런 장점을 만든 것은 아니다. 어쩌다보니 정부, 의사, 시민, 모두 적당히 현실적인 이익을 얻는 ‘묘한 균형’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당연히 이런 ‘묘한 균형’을 넘어 ‘한정된 자원으로 시민에게 최대한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는 개선’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민간병원이 만악의 근원이다’, ‘공공병원만 만들면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외치는 것으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폴 포트의 ‘킬링필드’, 모두 적어도 시작은 선의였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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