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영국과 ‘코로나 대전’ 한국의 고위층

[Dr 곽경훈의 세상보기] 서울대병원 부총리 아들 입원

1871년 프로이센(옛 독일)과 프랑스 간의 보불전쟁이 끝난 뒤 유럽은 40년에 걸친 유례없는 평화를 누렸다(1871년부터 1914년까지 작은 규모의 분쟁은 발발했지만 강대국 사이의 전면전은 없었다).

그 기간에 영국도 ‘대영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란 문장에 어울리는 번영을 구가했다. 그래서 1900년대가 시작할 때만 해도 다들 희망에 부풀어 ‘새로운 세기’를 낙관했다.

그러나 1차 대전과 함께 그런 장밋빛 예상은 산산조각 났다. 미국이 참전해서 영국은 가까스로 독일을 막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미 노쇠한 상태였다.

그래서 1차 대전이 끝나고 20년 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잠시 연기했던 악몽이 현실에 드러났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본토의 동맹국은 맥없이 무너졌다. 프랑스 전선에 파견했던 영국군은 장비를 죄다 버리고 덩케르크에서 간신히 ‘몸만’ 빠져나오는 치욕을 경험했다.

미국은 국내의 반대여론에 부딪혀 참전을 망설였고 그동안 영국은 홀로 독일에 맞서야 했다. 독일해군의 전설적인 ‘U-보트’가 영국으로 향하는 선박을 격침해서 식량과 물자가 부족했고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공군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영국을 폭격했다. 런던이 불바다로 변하는 일은 더 이상 놀랄만한 뉴스가 아니었고 상점의 진열대는 텅텅 비어 시민은 생필품을 배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영국시민의 의지는 강했다. 왜냐하면 조지 6세를 비롯한 왕실가족이 ‘안전한 시골로 피난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런던을 지켰고 전시내각을 이끈 윈스턴 처칠 역시 런던에 머무르며 시민과 위험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한 지도 어느덧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2000년 이후 신종 플루, 사스, 메르스 같은 신종전염병 유행을 경험했으나 ‘코로나19 대유행’은 환자 숫자와 해당 질병이 우리에게 준 영향을 고려하면 중세의 흑사병 혹은 1918년 스페인독감에 버금가는 ‘전지구적 재난’이다. 그래서 질병 자체는 의학적인 문제이지만, 질병이 남긴 피해는 사회적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코로나19 같은 대유행을 극복하는 것에는 의료인과 보건학자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관료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정치인과 관료는 의료인과 보건학자 같은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과 동시에 거기에 국한하지 않고 경제적인 부분, 개인의 인권과 공동체의 안녕, 외국과의 협력 같은 다양한 측면을 아우르는 정책을 만들고 실행할 임무가 있다.

또, ‘거물정치인’과 고위관료는 거기에 덧붙여 시민과 함께 할 의무가 있다. 다시 말해, 조지 6세와 윈스턴 처칠이 안전한 시골로 피난하지 않고 런던에서 독일공군의 공습을 시민과 함께 버틴 것처럼 ‘특별대우’를 바라지 않고 평범한 시민과 함께 대유행을 견딜 의무가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정부 재정을 책임지고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부총리의 아들이 서울대 응급실을 찾아 ‘특별대우’를 받아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코로나19 확진자와 아주 심각한 질환에 걸린 환자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입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부총리의 아들은 병원장의 명령에 힘입어 입원했다. 물론 부총리의 아들이 입원한 특실은 원래 비어있던 곳이라 그 자체가 코로나19 환자의 진료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서울대 병원’이 지니는 상징성을 감안하면 코로나19 대유행이 심각한 상황에서 부총리의 아들이 특별대우를 받아 입원한 것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 조지 6세와 윈스턴 처칠이 시골로 피난하지 않고 런던에 머무른 이유를 부총리를 비롯한 고위관료는 꼭 한 번 살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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