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에 빛을!” 망막질환 ‘맞춤 치료’ 꿈꾸는 의사

[핫 닥터] 세브란스안과병원 변석호 교수

환자를 전신 마취했다는 신호를 보내자, 약제과에서 영하65도로 보관 중이던 약을 녹이기 시작했다. 1시간이 지나 약이 도착했고, 한쪽 눈에 구멍 3개씩 뚫고 눈알을 채우고 있던 유리체를 걷어냈다. 망막에 주사를 꽂고 약을 투입할 때 가슴이 살짝 떨렸다. 환자의 망막이 얇아질 대로 얇아져, 조금만 잘못해도 구멍이 뚫릴 수 있었기 때문.

지난 7월19일 세브란스안과병원 1층 수술실. 변석호 교수(50)는 글로벌 제약사 노바티스 사의 무상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레버 흑암시증’ 탓에 두 살 때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한 A씨(30·여)에게 국내 두 번째로 유전자 치료제 럭스터나를 주입하는 수술을 했다.

이 병은 처음 실체를 규명한 독일 안과의사 레버 박사의 이름과 ‘시야가 검고 어둡다’는 뜻이 합쳐진 병명처럼 환자의 삶을 암흑 속에 몰아넣는다. 최근 KBS TV ‘인간극장‘에서 소개된 12세 피아니스트 김건호 군의 시력을 앗아간 병이기도 하다. A씨는 20여 년 동안 낮엔 세상이 흐릿하게 보여서 느릿느릿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밤에는 집밖 시야가 검정 도화지 같아서 집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A씨는 수술 뒤 병실로 옮겨져 24시간 눈에 붕대를 감고 지내다 다음날 퇴원했고 1주 뒤 외래진료 때 시야가 조금씩 밝아지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한 달 뒤 진료실에 와서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 엄마랑, 강아지랑 산책을 다녀왔어요. 사람과 건물, 자동차의 형체가 보여요. 낮엔 희미하게 형체만 보이던 표지판 속에서 흐릿하지만 글자가 보이기 시작해요.”

환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뜨거워지던 변 교수의 눈앞엔 전공의 때 스승 권오웅 교수(현 누네안과병원)의 모습이 펼쳐졌다. 스승은 선천성 눈질환 환자 앞에서 낙담하는 제자에게 “외국 논문을 보니 레버 흑암시증 같은 난치성 눈질환도 유전자 치료로 치료하는 날이 올 것 같다”면서 “이를 대비하며 연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20여 년이 지나서 실제로 유전자 치료에 성공한 것이다.

변 교수는 급속히 성장하는 망막 치료 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했고, 이에 가속도를 붙일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의사다. 그는 1997년 연세대 의대를 수석졸업하고, 인턴 때 내과와 안과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다가 치료 중 환자의 생명을 잃는 내과의사의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안과에 지원했다. 그러나 안과에는 급격히 시력을 잃어가는 환자들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하는, 안과 의사만의 슬픔이 있었다. 특히 변 교수의 전공의 시절 망막질환으로 병원으로 오는 환자의 대다수가 세상을 보는 기쁨을 잃고 암흑 속으로 들어갔다. 교과서의 치료는 오히려 환자를 더 좌절시키기 일쑤였다.

변 교수는 2006년 해군 군의관을 마치고 전임의로 들어오면서, 제자들에게 엄격하지만 자신에겐 더 엄격하던 권오웅 교수의 열정에 이끌려 망막질환을 세부전공으로 삼았다. 그 선택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스승은 매일 국제 논문을 보면서 새 치료법이나 기구에 대해서 국내에서 가장 먼저 적용해온 ‘안과의 얼리 어댑터’로서 제자에게 “조만간 환자의 병을 제대로 치료하는 시대가 온다”면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승은 당시 직장암 치료제로 쓰이던 약제를 황반변성 치료제로 전환시켜 효과를 보고 있다는 논문을 읽고, “우리도 써보자”고 결정했고, 사제는 국내에서 황반변성 주사 치료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그때까지 황반변성의 주치료는 레이저 치료였지만, 환자의 실명을 막지 못했다. 이 치료는 산불의 발화점 주위로 맞불을 놓아 불이 번지는 것을 막듯, 황반 주변을 레이저로 지져 최종적으로 진행을 약간 늦추는 방법. 교과서에는 실명시기를 약간 늦춘다고 돼 있었지만, 시술 뒤 환자들이 “앞이 더 안 보인다”고 절망의 원성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이에 비해 주사요법은 그야말로 ‘기적의 치료법’이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늘 주지시켰고, 변 교수는, 나중에 난치성 눈질환 연구와 치료에 결정적으로 적용될지는 몰랐지만, 매주 하루 병리학과 박국인 교수 연구실에서 줄기세포 연구에 매달렸다. 변 교수는 또 망막질환의 중요검사법인 ‘빛간섭단층영상촬영(OCT·Optical coherence tomography)’이 개발되자 국제학술지에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세계의 안과 의사들과 연구경쟁을 벌였다. 시세포의 끝층에서 잘 보이는 ‘코스트 로스트(Cost Rost) 층’의 성격을 규명해 명명한 것은 세계 표준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는 또 2015년 OCT를 통해 당뇨성 황반부종의 직접 원인이 되는 미세혈관류를 찾아 선택적으로 응고시키는 치료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변 교수는 2016~17년 미국 밴드빌트 대를 거쳐 세계 최초, 최대 안과 전문병원인 영국 무어필즈안과병원에서 린던 다 쿠르즈 박사 밑에서 임상 참관과 함께 인공망막 연구에 발을 디뎠고, 귀국해서 국내 최초로 ‘망막 오가노이드 연구소’를 개설했다. 오가노이드는 인체 장기와 유사한 구조, 세포구성, 기능을 가진 3차원 세포 덩어리를 가리킨다. 망막은 해부학적으로 조직검사가 거의 불가능한 위치에 있어서 망막 연구와 치료를 위해 오가노이드가 필수적이다.

변 교수는 2014년 제자의 논문 사기 사건에 책임감을 느끼고 극단적 선택을 한,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천재 줄기세포 연구가’ 사사이 요시키 교수가 정립한 방법을 응용해 최근까지 망막 오가노이드를 10여 개 만드는데 성공했다. 환자의 유전적 특징에 맞는 맞춤치료를 실현할 기반을 갖춘 것. 전임의 때 스승의 당부에 따라 줄기세포를 연구한 것과 영국 연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그는 “운이 좋게도, 급속히 발전하는 망막치료 분야를 맡게 됐고, 유전자 맞춤치료로 환자의 눈을 지키거나 시력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변 교수는 한 해 망막에 병이 생긴 800여 명의 환자를 보고 있다. 이 가운데 30%는 황반변성, 20%는 당뇨병성 망막증, 나머지는 망막박리, 포도막염, 희귀 유전자 질환 등이다.

이 가운데, 특히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황반변성은 예전보다는 치료법이 진일보했지만, 발병의 원인과 과정이 명확히 규명되지도 않았고, 쉽사리 완치되는 병이 아니어서 진료에 신중을 거듭한다. 특히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나머지 한쪽 눈만 남았을 때 고심이 깊어진다. 2013년 54세 때 내원한 환자는 한쪽 시력을 잃고 1년 뒤 나머지 눈에 발병했다. 망막색소상피파열로 시력이 0.1까지 내려가서 위태위태했지만 적극적 주사요법으로 0.7까지 올렸고 지금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환자는 불안감 때문에 증세가 재발하지 않았는데도 주사를 맞기를 원하는데, 상황에 맞춰 환자의 요구에 응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주사를 맞을 때 환자의 불안함을 누그러뜨리려고 환자의 상태가 좋아지면 가급적 주사를 덜 맞게 했습니다. 일부 환자가 증세가 나빠졌다고 원망하는 목소리를 듣고 환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스스로 반성했습니다. 환자는 스승이고, 환자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의사의 기본이니…”

변 교수는 어떤 환자를 좀 더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할지에 대한 연구도 열심이다. 2019년 후배 이준원 교수와 함께 한쪽 눈에 ‘습성 황반변성’이 생긴 환자의 21%가 다른 눈에도 발병하고, 특히 눈에 노폐물 드루젠이 쌓여 있을 때 발병 확률이 높다는 것을 밝혀내 《미국안과학회지》에 발표했다.

변 교수는 몇 년 전만 해도 ‘80, 90대 환자를 꼭 치료해야 하나’하고 적극 치료에 주저했지만, 지금은 환자와 가족이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있다.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는 존재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검사→진료→치료’를 1~2시간 안에 끝낼 수 있도록 환자 위주의 시스템도 구축했다. 아직 수많은 망막 환자가 완치되고 있지는 않지만, 국내외 안과 의사들이 함께 그 길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으며….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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