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음악사에 ‘오선지’ 그린 두 의사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⑰테너 이인선과 피아니스트 정진우

대한민국 첫 오페라 ‘춘희’에서 열연하고 있는 이인선과 김자경.

의사들은 대한민국 음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의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옛날엔 기독교 가문에서 의사가 많았는데, 어릴 적부터 서양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특히 이인선과 정진우는 대한민국 음악사에서도 뚜렷한 음표를 남긴 의사였다.

사진 출처=월간 리뷰

이인선(1906~1960)은 목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서 선교사들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성악을 배웠다.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을 다니고 이어서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29년 세브란스의전 교가 공모에 응모해 당선됐다. 1931년에 졸업해 황해도와 함경남도, 서울에서 개업했고 김포에 있는 미군병원에서도 근무했다.

재학시절에 세브란스병원 존 부츠 치과과장(한국명 부소·夫蘇)의 부인 플로렌스 슈마허 부츠에게서 성악을 배웠으며, 일본 도쿄음악학교 출신의 ‘국내 최초 피아니스트’ 김영환 연희전문학교 음악부장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이인선은 1934년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서 3년 동안 유명 성악가들을 사사하고 귀국, 서울에서 개업했다. 1937년 귀국하자마자 성악연구소를 설립했고, 저녁 7시부터는 성악을 가르쳤으며, 서울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에서 귀국 독창회를 개최했다. 그 후 평양, 일본 도쿄 히비야, 중국 베이징 등에서 독창회를 가졌는데 그 때마다 관객이 꽉 차곤 했다.

1946년에는 한국벨칸토회(현 한국성악회)를 창설해 김기령, 김복희, 김신환, 김자경, 송진혁 등 훗날 우리나라를 대표하게 될 성악가들을 배출했다. 1948년에는 조선오페라협회를 창단했고, 서울 명동에 있는 시공관(옛 국립극장)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춘희’로 번역해서 공연하였는데, 그는 작품의 번역과 제작 그리고 남자주인공 역을 담당했다. 여주인공은 김자경과 마금희가 맡았다. 춘희는 국내 최초로 공연된 오페라로 음악사에 기록돼 있다. 이인선은 1950년엔 비제의 ‘카르멘’을 번역해 시공관에서 공연했으며, 남자주인공 역을 맡았다.

이인선은 공연 경비를 충당하려고 집문서와 피아노를 담보로 맡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의 업적과 정열은 대단하였음을 당시의 예술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했으며 존경의 대상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950년 의학과 음악을 계속해서 공부하려고 미국으로 갔다. 1952년 동양인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오디션에 합격해 성악가로서의 실력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그리고 아리랑, 천안삼거리 등 우리나라 민요를 번역, 편곡하여 출판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음악을 세계로 소개했다.

이인선은 귀국해서 ‘오페라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1960년 3월 19일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간암 수술을 받다가 별세했다. 몇 달 뒤 이인선의 유품이 국내에 도착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의 복사본이 있었다. 편지에선 애국가의 가사의 문법과 의미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수정한 가사에 맞춰 새로 작곡한 국가의 악보가 담겨있었다. 별세하기 직전까지 조국을 생각하며 애국가를 수정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인선의 맑은 목소리와 벨칸토 창법은 대단했다. 제자를 가르칠 때 의학적으로 발성기관 해부도를 만들어서 강의했고, 외국 가사는 영어 발음부터 억양까지 모두 가르치는 등 관련되는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번역한 우리말 가사는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이인선상’이 매년 국내 최고의 오페라 가수에게 수여되는, 최고 권위의 상으로 자리잡았다.

사진출처=피아노음악

정진우는 1928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다섯 살 때부터 집에 있는 풍금으로 교회에서 배운 찬송가를 치기 시작하였다. 평양 남산소학교(초등학교) 남궁요한나 선생을 사사했고, 평양제일중에서 일본인 음악교사를 만나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공부를 잘 한 정진우는 평양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음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의 설득으로 1945년에 평양의전에 입학했다. 평양의전 학생으로서도 ‘피아노 광‘으로 활약했다. 1946년 월남해서 서울로 온 정진우는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였는데, 의학공부와 아울러 음악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그는 직업합창단인 서울합창단의 피아니스트가 되었는데, 의대생으로서 공부하면서 연주회와 방송, 지방순회 공연 등으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의대를 졸업한 정진우는 내과 수련의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엔 공산군 치하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군의관으로 자원입대하여 전선에 배치됐는데, 강원도 전투에서 포탄과 폭설에서 동상을 입고 양쪽 발가락을 잃은 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1951년 육군대위로 명예 제대했다. 피난 시절인 1952년에 부산 이화여대 강당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가졌다.

피아니스트로 소문난 정진우는 이화여대 강사가 됐으며, 1957년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가서 한스 베버를 사사했다. 1959년 귀국한 정진우는 서울대 음대 전임강사가 됐고 음악 교육자로서 제자를 키우는 데 전념했다. 바이올린의 최영우, 첼로의 전봉초와 함께 ‘서울트리오’를 만들어 실내악 연주를 했다.

한 편 뒤늦게 미뤄뒀던 의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서 1973년에 ‘일정한 음악이 정신과 환자에게 미치는 정서 반응’이라는 논문으로 가톨릭대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음악계에 기여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가 《피아노음악》이라는 음악전문잡지를 창간했고, 2002년에는 현악전문잡지 《스트링 앤 보우》도 펴냈다. 정진우는 고령의 나이에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로 제자를 양성하는데 정진하고 있다.

에디터 kormedimd@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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