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보건총감 에버렛 쿱 Vs 대한민국 보건 공무원

[Dr 곽경훈의 세상보기]

제2차 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그래도 분위기는 어둡지 않았다.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려서 냉장고와 세탁기를 갖춘, 교외의 집에 살며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중산층이 등장했고 인공위성과 유인 우주선은 소비에트 연방에게 선수를 빼앗겼으나 달에 최초의 인간을 보내면서 자존심을 회복했다. 미국의 밝은 미래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에 비견하던 존 F.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형제가 암살당하고 호기롭게 참전한 베트남 전에서는 쓰라린 패배를 겪어야 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과 함께 닉슨 대통령은 탄핵에 직면하여 물러났다. ‘선량한 이상주의자’인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했지만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촉발한 인질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선량하지도 않고 이상적이지도 않으며 그저 무능한 정권이란 것을 드러냈다. 그런 가운데 경제에도 위기가 닥쳐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기세에 쫓겼다.

1980년대를 맞이한 미국의 상황은 엉망진창이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인은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지미 카터 대신 보수주의자인 로널드 레이건을 선택했다. 영화배우 출신이며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지미 카터와 대척점에 있던 로널드 레이건은 경제적으로 미국에 도전하는 일본을 보호무역 색채가 짙은 정책으로 제압했고 ‘스타워즈 계획’으로 대표하는 군비증강으로 냉전 상대인 소련을 자멸로 이끌었다. 내부적으로도 1960~70년대의 진보적인 ‘히피 문화’를 제거하려고 보수적인 복음주의 기독교를 바탕 삼은 정책을 추진했다.

유명한 소아외과 의사이며 강경한 낙태반대론자인 찰스 에버렛 쿱을 보건총감(Surgeon General)에 지명한 것은 레이건 정부의 보수적 국내 정책의 전형에 해당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낙태반대운동을 이끈 사람을 미국의 공공의료와 의료정책을 책임지는 보건총감에 지명했으니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천신만고 끝에 겨우 청문회를 마쳤다.

그러나 정작 보건총감에 오르자 찰스 에버렛 쿱은 보수와 진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낙태보다 에이즈바이러스(HIV)와 흡연이 한층 심각한 보건학적 위험이라 판단해서 마약 중독자에게 1회용 바늘을 나누어 주고 학생들에게 성교육을 강화하며 ‘순결교육’ 대신 콘돔 사용을 가르치는 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강력한 금연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자 찰스 에버렛 쿱의 예상하지 못한 행보에 놀란 공화당과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그를 배신자라 비난했고 담배회사와 담배 재배 농민의 지지를 무시할 수 없는 민주당 정치인 역시 그를 비판했다. 그래도 레이건 대통령은 에버렛 쿱을 해임하지는 않았으나 8년 내내 ‘낙태를 불법화하는 시도에 동참하거나 최소한 낙태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찰스 에버렛 쿱은 보건총감으로 일한 8년 내내 HIV 예방과 금연에 집중할 뿐, 낙태를 반대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통령의 압박이 강해지자 임기 끄트머리에 ‘보건총감의 임무는 미국인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라 낙태가 여성의 건강에 해롭다는 명백한 의학적 증거가 없는 이상 낙태를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선언할 수 없다’고 밝힌 편지를 보낸다. 보건총감은 개인적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확고부동한 낙태반대론자였지만 미국인을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지키는 자리가 아니라 미국인의 건강을 지키고 보건학적 위험을 경고하는 자리여서 낙태가 여성의 건강에 해롭다는 명백한 증거를 찾기 전에는 단순히 대통령이 원한다고 낙태를 반대할 수 없다는 것이 찰스 에버렛 쿱의 신념이었다.

며칠 전, 전문가 집단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자가진단키트의 사용을 허가했다. 29일부터 약국 판매가 시작됐고, 일부 언론에서는 체험 기사가 나가고 있다. 업체와 주장과 달리 정확도, 특히 민감도가 현격히 낮은 자가진단키트가 초래할 위험은 이미 의료계의 많은 전문가가 경고했고 본 칼럼에서도 밝혀서 굳이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자가진단키트를 허가하는 과정에서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질병관리청의 공무원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찰스 에버렛 쿱처럼 내부적으로는 자신이 지닌 개인의 정치 성향과 종교적 믿음, 외부적으로는 정치권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주어진 의무에 충실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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