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베닥] 염증성 장질환 악몽 멈추게 돕는 ‘진심 의사’

㉝대장질환 분야 강북삼성병원 소화기내과 박동일 교수

“저, 사법시험 합격했어요. 곧 연수원 들어가요.”
30대초의 여성 환자는 진료가 끝나자 넥타이가 담긴 선물박스를 내밀며 말했다. 10여 년 동안 크론병과 사투를 벌인 순간들이 스쳐서일까,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눈시울은 촉촉이 젖어있었다.
“저는 남들처럼 공부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없었다면….”
2016년 2월, 성균관대 강북삼성병원 소화기내과 박동일 교수(54)는 환자를 보며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의사가 되길 잘 했다.’

환자는 10여 년 전 절망의 표정으로 진료실 문을 두드렸었다. 투병에 지쳐있었고 영양섭취가 안 돼 꼬챙이 같은 몸으로 항문 주위에 고름주머니를 차고 있어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박 교수는 환자를 격려하며 함께 사투를 시작했다. 이듬해 생물학적 치료제를 처방해서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더니, 3년 뒤부터 눈에 띄게 호전됐다. 환자는 진득하게 의자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사법시험 준비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설마’ 했는데 마침내 합격 소식을 전했고, 최근에는 결혼했다는 소식까지 더해왔다.

크론병, 궤양성대장염 등 염증성장질환 환자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 설사와 혈변, 영양 흡수부족 등으로 삶이 황폐화하기 십상이다. 박 교수는 이들 환자가 고통을 이겨내고 건강을 지키는 것을 도우며 그야말로 동고동락하는 의사다.

전국의 대학병원을 전전하다가 찾아온 중1생은 키가 초등 저학년생 정도였지만, 6개월 뒤부터 키가 크더니 고교 때 180㎝를 넘겼다. 크론병 때문에 대장이 터져서 거듭 수술을 받아 소장이 1.5m도 남지 않아 생명이 위태로웠던 수많은 ‘단장증후군’ 환자들이 생물학적 제제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인터넷의 염증성장질환자 환우회 커뮤니티에서는 박 교수의 뛰어난 진료성과 못지않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하고 꼼꼼한 진료에 대한 칭찬과 감동의 글들이 자자하다.

박 교수는 중2무렵에 내과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으며 한양대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내과 전공의 과정에 들어가면서 그 꿈을 이뤘다. 한양대에는 당시 국내 내시경의 개척자인 박경남 기춘석 교수, 이건희 전 삼성그룹 명예회장의 주치의로 삼성서울병원의 주춧돌을 세우고 퇴임한 뒤 지난해 창원보건소장으로 가서 화제가 된 이종철 교수, 간질환 명의 이동후 이민호 교수 등이 ‘막강 소화기내과’를 자랑하고 있었고 박 교수는 소화기내과를 지원했다.

그는 전공의 1년차 때 쟁쟁한 스승들 가운데 이종철 교수에게 찾아가 제자로 삼아줄 것을 간청했고, 스승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박 교수는 심신이 고달픈 내과 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주말마다 스승의 하명에 따라 닭을 잡아야만 했다. 닭 날개 혈관에 방사선동위원소를 투입하고, 동위원소가 혈관을 돌아서 간에 모일 때쯤 닭을 잡아 간을 잘게 썰어 볶음밥을 만들었다. 소화기 환자들에게 이 볶음밥을 먹게 하고 동위원소에 따라 소화 속도를 측정, 위장운동장애를 진단하는  것을 통해서 연구의 세계를 익혔다. 그러나 스승은 이건희 회장의 요청을 못 이기고 개원을 준비하던 삼성서울병원으로 떠났다.

박 교수는 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치고 삼성서울병원 전임의 공채에 합격해서 스승이 있는 병원으로 따라갔다. 그러나 전임의를 마쳐도 그를 위한 교수 자리는 없었다.

2001년 박 교수는 미국암학회의 연구자금을 지원받아 헬리코박터균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피츠버그대 안토나이 필베라 교수 연구실로 연수를 떠났다. 출발일이 9월11일, 세계를 놀라게 한 테러 때문에 알래스카 페이뱅크에서 3박4일 묶이는 우여곡절 끝에 시카고를 경유해 피츠버그에 도착, 주말도 잊고 몽골리언 게르빌 쥐 실험과 유전자 연구에 매달렸다.

박 교수는 2002년 미국 메릴랜드에서 개최된 ‘소화기병주간’ 학회에서 강북삼성병원에 교수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해서 합격했다. 그는 이듬해 근무를 시작하며 병원 옆 3층 주택의 1층에서 소화기연구실을 세팅했고, 피츠버그대에서의 연구를 바탕으로 HER-2 유전자가 대장암에 미치는 연구에 대한 논문을 《국제대장질환지》, 《소화기병과 과학지》 등에 발표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박동일 교수는 의대생 때 “염증성장질환 환자는 국내에서는 없지만 외국에서는 흔하다”고 배웠다. 전공의 때 한두 명 환자가 보이더니, 2000년대에는 환자가 늘기 시작했다. 2009년 미국 시애틀의 프레드허킨스 암연구소의 윌리엄 그래디 교수 랩에 연수를 다녀오고 나서 환자가 급증하는 것을 실감하는가싶더니, 현재는 크론병 환자 350명, 궤양성대장염 환자 600여명을 돌보고 있다.

박 교수는 2013년 염증성장질환 클리닉을 개설해 체계적으로 환자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밤에 환자가 급히 응급실에 오면 어떤 순서로 체크를 하는지를 비롯한 매뉴얼을 만들었고, 전담 간호사 연수프로그램을 출범시켰으며 매년 3, 4회 환우회 모임을 통해 환자가 스스로 병을 이겨낼 방법을 가르쳐줬다.

2018년 클리닉은 센터로 승격됐다. 센터에서는 소화기내과, 외과, 류마티스내과, 안과, 피부과, 병리과, 영상의학과 교수들이 협력 진료를 시행한다. 전문 간호사가 24시간 핫라인, 전용 SNS 채널를 운영하며 환자와 소통하며, 별도로 꾸려진 영양팀은 장 질환 환자를 위한 식단을 관리한다. 박 교수는 매일 스마트폰을 통해 환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박 교수는 환자의 경제사정까지도 신경 쓰는 의사로 알려져 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염증성장질환의 치료는 레이케이드 주사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첫 투여 후 2주째, 6주째, 이후 8주마다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주사 한 방이 200만~300만원이나 됐다. 박 교수는 젊은 환자들이 효과를 보지 못하면 건강뿐 아니라 집안이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게 되므로 혼신의 힘을 다해 환자를 봤다. 또 환자의 경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외국 제약회사들에게 연락해서 신약 임상시험에 참여케 했으며, 이 경험이 자연스럽게 현재 10여 개의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박 교수는 환자뿐 아니라 동료 의사와 간호사, 다른 병원의사와의 협업을 통해서 진료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는 2003년부터 대한장연구학회에 참여해서 다른 의사들과 함께 공부해왔으며, 2012년 국내외 의사들과 함께 AOCC(아시아크론병학회) 창립에 힘썼고 서울대병원 김주성, 고려대안암병원 진윤태 교수와 함께 AOCC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박 교수는 2016년부터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으며 15개 병원의 의사들과 함께 크론병의 합병증을 예측해서 대응할 수 있게끔 연구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에 환자의 장내 미생물 조성에 따라 다른 예후에 대한 예측 모델을 《임상의학지》에 발표했으며, 연말에는 인공지능(AI)이 유전자 칩에 따른 유전자 정보와 대변의 장내미생물정보, 임상진료정보를 분석해서 나쁜 예후를 예측하는 모델에 대한 연구결과를 온라인으로 개최된 AOCC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박 교수는 또 2015~2019년 대한장연구회 염증성장질환연구회의 위원장으로서 환자를 위한 요리책 발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이끌었다. 의사 교육용 동영상 10개를 만들어 배포했으며 염증성장질환 간호사 양성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박 교수의 카카오톡 자기소개 단문은 ‘내 안에서 답을 찾자!’이다. 환자에게서나 병원, 학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매일 오전 6시 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내려 병원까지 청계천을 걸어서 출근하고 늦은 밤 같은 길을 되돌아가며 퇴근하는데,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찾고, 풀어낼 방법을 고민하곤 한다. ‘내 안에서 답을 찾자!’ 이 말은 건강을 위해 자신과의 싸움을 지속해야 하는 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베닥은 의사–환자 매치메이킹 앱 ‘베닥(BeDoc)’에서 각 분야 1위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소개하는 연재입니다. 80개 분야에서 의대 교수 연인원 3000명의 추천과 환자들의 평점을 합산해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통해 참의사의 본모습을 보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베닥 선정을 통한 참의사상 확립에 큰 힘이 됩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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