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 1만명 수술 ‘눈앞’… 부모 눈물 씻어주는 의사

[대한민국 베닥] ③소아안과 한승한 교수

연세대 세브란스 안과병원 한승한 교수(60)는 25년 동안 사시(斜視) 어린이 8000여 명을 수술해서 ‘바로 보는 기쁨’을 선사해준 의사이지만, 하마터면 이 소명과는 다른 길을 갈 뻔했다. 한 교수는 자신의 뜻과 다르게 들어선 길에서 최선을 다하고 행운이 더해져 소아안과 분야의 대가가 됐다.

한승한 교수의 집안은 위아래 삼대가 세브란스병원 안과 의국 출신이다. 선친 한경식 전 대한안과학회 회장은 전공의 제도가 정식 시행됐을 때 경북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역 앞 도동(복숭아골) 세브란스병원에서 첫 수련을 받았다. 아들 재용 씨는 가톨릭대학교 의대를 졸업해서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전공의 4년차로 근무하고 있다.

한 교수는 친가, 외가 모두 의사들이 득실대는 환경에서 컸지만 학창시절 모형 항공기, 전축, 라디오, 사진기 등을 뚝딱뚝딱 분해하거나 조립하는 것을 즐겨서 공대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권에 떠밀리다시피 해서 연세대 의대에 진학해야만 했다.

한 교수는 한동안 암기 위주의 공부에 흥미가 없어 겨우, 겨우 학교생활을 하다가 본과 4학년 때 안과를 전공으로 선택하면서 의사란 직업에 흥미를 갖게 됐다. 어릴 적부터 손으로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현미경 수술을 비롯한 미세작업이 많은 안과가 자신과 맞았다. 자신이 사랑한 사진의 세계는 눈의 작동원리와 거의 비슷했다. 한 교수는 고2 때 서울 노량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당숙의 영향으로 사진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예과 때 ‘세란 사진반’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며 카메라를 사랑했었다.

한 교수는 전공의를 마치고 군의관 복무 뒤 김홍복, 김응권 교수 밑에서 카메라의 렌즈에 해당하는 각막에 병이 생긴 환자를 봤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는 전임의로, 용인세브란스병원에선 안과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궁둥이에 바람 소리가 나게 바쁘게 움직이며 환자를 봤다. 한 교수는 주임교수에게 추석 인사를 하러 갔다가 머리가 멍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병원이 안이비인후과병원을 만들 예정이다. 소아안과 분야로 유학 가서 교수 될 준비를 해야겠다.”
“저는 각막을 주로 보고 있는데…”
“분야별로 교수 2명이 있어야 하는데, 소아안과는 1명뿐이네.”
“그렇다면, 어느 병원의 누구에게 가야 하겠는지요?”
“자세한 것은 자네가 알아서 내년 봄에 떠나도록 하게.”

하늘이 까마득하고 막막했다. 게다가 주위를 보니까 해외연수 목표를 잡으면 최소 1, 2년 전에 원하는 곳의 허락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5개월도 남지 않았다. 외국의 소아안과 교수 중에선 아는 사람도 없었다. 군의관 때 나름대로 영어 공부를 했지만, 영어가 통할지 자신도 없었다. 이듬해 연수 계획이 있었던, 형처럼 모시던 성공제 교수를 찾아갔다. “난감하겠지만 길을 찾아보자. 일단 다음 달 미국안과학회가 댈러스에서 열리니 무조건 가보자.”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더니, 길을 찾았더니 어슴푸레 길처럼 보이는 게 있었다. 댈러스의 학회 구석에서 팔고 있던 ‘미국 전문의 지원 안내서’가 눈에 들어왔고, 책을 펼쳤더니 세부 전공별로 지원할 수 있는 병원과 의사 목록이 있었다. 소아안과에는 100여 명이 있었고, 일일이 손편지를 쓰기로 했다.

한 교수가 ‘파란 눈의 한국인 의사’ 인요한 교수에게 찾아갔더니, 이미 그런 부탁을 한 의사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영어로 된 의뢰서 샘플들이 여럿 있었다. 한 교수는 100여 명에게 일일이 지원서를 써서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그러나 미국의사면허도 없고 미국 병원 경험은커녕 영어 시험 성적도 없는 한국인 의사에게 오는 답신은 ‘정중한 거절’뿐이었다. 스승의 명을 거역할 수밖에 없나, 매일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입이 바싹 마르고 등에서 식은땀이 나던 때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더람에서 연락이 왔다. 미국 안과학계에서 ‘떠오르는 스타’였던, 듀크대 의대 에드워드 벅클리 교수였다.

“연락이 늦었는데, 우리 연구실에 올 수 있겠나?”
“오브 코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벅클리 교수 연구실에는 원래 레바논의 아메리카의대에서 안과의사가 오기로 돼 있었지만 내전 때문에 실종돼 ‘대타’를 찾고 있다가 서울에서 온 편지를 봤다. 연구실에서는 눈떨림(안진)의 파형을 기록해서 치료 방향을 결정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한 교수의 경력은 ‘딱’이었다. 연구실에서는 임시의사면허 발급, 전문의 사무실, 보험 제공, 동창회 가입 등의 파격적 조건을 제시했다.

한 교수는 영어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으로 갔지만 처음 찾아간 교수 비서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린이 환자들 앞에서 더듬거리자, 벅클리 교수는 통역으로 실습 학생을 붙여줬다. 한 교수는 벅클리 교수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매주 실험결과를 꼼꼼히 정리해서 교수 편지함에 넣었다. 또 매주 20여 명 수술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관해서 조금이라도 궁금한 게 있으면 더듬거리며 물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자 벅클리 교수가 불렀다. “요 앞의 재향군인병원에서 안과 의사가 필요한데 근무하지 않겠느냐?” 한 교수는 가슴이 부풀어 올랐지만, 서울 이성철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교수 자리 났으니 빨리 오라신다!”

마침 그때는 북한 핵문제 때문에 한반도가 벼랑에 있을 때였다. 북한의 박영수 협상 대표가 ‘서울 불바다 발언’을 내뱉었고, 미국은 북한을 공습할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미국의 TV에서는 늘 위태위태한 소식을 전했다. 벅클리 교수는 “전쟁이 날 줄도 모르는데 왜 가려고 하느냐?”고 말렸다. 그러나 서울에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스승들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귀국하자마자 군대 소집령이 나왔다. 어린이대공원에서 버스를 타고 전방으로 투입돼 권총을 지급받고 며칠 대기하다가 집으로 왔다.

귀국 다음 달, 한 교수가 듀크대병원을 떠날 때 자신의 통장에서 거금 100만원으로 구입한 장비를 갖고 출근하자, 안이비인후과병원 개원을 눈앞에 둔 권오웅, 홍영재 교수가 물었다.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보톡스로 사시 치료하는 데 쓰는 장비입니다. 미국에선 요즘 보톡스로 사시를 치료하기 시작….” 스승들의 눈이 번쩍였다. 새 병원의 최신의술을 알릴 최고의 홍보거리였던 것이다.

병원이 개원 기자회견 때 이 방법에 대해서 알리자 ‘첨단 치료법’은 KBS, MBC, SBS 방송 3사의 저녁 뉴스와 주요 신문에 모두 보도됐다. 이튿날 아침부터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왔다. 다른 병원 안과 의사들은 “환자 다 뺏어간다”고 아우성이었다. 5년 동안 한시도 쉬지 못하고 환자를 보다가 강남세브란스병원(당시 영동세브란스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의 이종복 교수가 신촌으로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고 강진경 원장이 “한 명 데려갔으면 한 명 보내야지!”하고 끊임없이 요구했기 때문. 강남의 수술실과 마취과 의사들은 ‘헉!’ 거렸다, 6개월 동안 수술할 어린이 환자 예약 리스트를 보고.

그러나 그곳에서는 수술실이 하나밖에 없어서 환자 수술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병원을 위해 기획실 부실장, 건강검진센터 소장, 홍보실장, 발전기금사무국장 등의 보직을 맡았다.

건강검진센터 소장을 맡았을 때 직원들에게 “우리는 환자가 아니라, 고객을 모시므로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면서 백화점 서비스를 도입하고 간호복 대신 정장을 입게 했다. 미국에서 환자를 유치하기 위해 애틀랜타, 시카고 등으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한 교수는 2016년 이종복 교수가 은퇴하면서 ‘을의 정신’으로 무장한 채 신촌으로 다시 돌아와 전국에서 몰려오는 환자들을 보고 있다.

한 교수는 1997년 보톡스 사시 치료 클리닉을 열였고, 보톡스를 이용한 사시 치료에서 국내외에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2005년 보톡스 주사요법과 마비된 눈 위아래 근육을 마비된 눈근육 쪽으로 옮기는 ‘근육전이수술’을 병행하는 치료법의 효과에 대해서 《미국안과학회 학술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또 소아 약시의 조기진단, 부분 차폐치료 등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이러한 임상과 연구에서 내공이 쌓여서인지, 전공의 앞에서 울고 칭얼거리던 아이들도 한 교수가 다가서면 울음을 멈춘다고 한다. 보호자들에게는 최대한 명쾌하게 설명해주려고 노력한다. 한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실망해서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부모들에게 매정하게 보일지라도 에둘러 설명하지 않는다. 부모에게 선택을 떠넘기지도 않는다. 그것이 근심을 조금이라도 줄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수술 적기에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한다. 한 교수는 “사시는 저절로 좋아지지 않으며 제때 진료받지 않으면 시력 발달과 입체시 형성에 지장이 생긴다”면서 “선천적 사시는 돌 무렵에 수술을 하고 두 돌이 되기 전에 모든 치료를 끝내야 하며 2, 3세 때 생긴 것은 4세 이전에 치료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시기가 촉박한 아기는 응급일정을 잡아서 수술한다. 한 교수는 환자 수에 큰 욕심을 내지 않아서 치료 1년 뒤에는 동네 병원으로 보내 환자가 대학병원에 오가며 느끼는 불편함을 줄여주려 애쓰고 있다.

환자 수 욕심을 내지는 않지만 앞으로 정상대로 수술을 한다면 퇴임 전에 1만 명 수술기록을 세울 듯하다. 자신이 아기 1만 명의 눈을 바로 잡아주고, 부모들의 눈물을 씻어줬다는 것을 기억할 훗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뿌듯해진다.

이성주 기자 stein3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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