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베닥] ‘제주 김사부’에서 모야모야병 세계 권위자로!

①뇌혈관질환 수술 김정은 교수

삐삐, 삐삐~, 병원 응급호출 신호가 찍혔다. 2002년 5월 어느 날 저녁 8시. 제주대병원 인근 숙소에서 막 귀가해 쉬려던 김정은 전임강사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응급실에선 36세 주부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혈관조영촬영을 했더니 뇌 깊숙한 곳 혈관이 꽈리처럼 부풀었다가 터져있었다. 전교통동맥류, 수술이 어렵고 성공률이 낮기로 유명한 그….

제주도에선 그때까지 심각한 뇌출혈이 생기면 ‘뭍’의 병원으로 보내왔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혈관이 또 터질 위험이 컸다. 김 박사의 세부전공은 뇌출혈이 아니라 뇌종양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서울행 비행기를 잡으려고 전화통과 싸우고 있던 환자 남편을 설득했다. 병원에선 전공의가 없었기에 선배인, 소아신경외과 심기범 교수와 남자 간호사에게 ‘보조’를 부탁했다. 6시간 동안 뇌혈관과 사투를 벌이고, 정상으로 되돌아온 생체신호를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 살렸다.”

닥터 킴은 동틀 녘 심 교수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이제, 제주도에서도 지주막하뇌출혈 환자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하며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김정은 교수(50)는 ‘뇌종양의 세계적 명의’ 정희원 전 서울대병원장의 문하에서 전공의와 전임의(Fellow)를 하면서 300여명의 뇌종양 환자를 수술했지만, 모교에는 자신의 전공을 살릴 교수 자리가 나지 않았다. 2002년 2월 김현집 주임교수가 조용히 불렀다. “말은 제주도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간다는데, 자네는 힘들게 서울로 왔는데, 혹시 제주도로 다시 내려가면 부모님이 섭섭해 하지 않겠는가?”

김 교수는 “자식이 고향에서 의술을 베풀면 부모님도 좋아할 것입니다”며 귀향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제주대병원에서는 뜻밖의 암초가 도사리고 있었다. 서울대병원에서 갈고닦은 최고의 의술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서울의 큰 병원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1년 동안 병원 직원 가족 2명만 수술했다. 신경외과 의사로서 허리 디스크가 터졌거나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들을 수술하면서 평범하게 살아야할까, 고민할 때 뇌출혈 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에선 주요한 뇌혈관이 터지는 ‘지주막하출혈’을 수술할 의사가 없어서 육지로 보내야만 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선 1분1초가 급한데, 밤에 환자가 오면 비행기가 뜨는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비행기에서 숨질 위험이 없다”는 의사소견이 있어야 탑승이 가능했고, 나머지는 속절없이…. 아침 비행기를 구해도 환자용, 보호자용, 의사용 등 좌석을 6개 이상 확보해야 하므로 편도만 최소 300만원이 드는 등 경제적 부담도 컸다.

김 교수는 이들을 위해 메스를 잡기로 결심했다. 수 백 명 뇌종양 수술을 하면서 뇌 구조에 대해선 자신이 있었다. 틈만 나면 뇌출혈 수술 비디오를 찾아보면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했다. ‘뭍’에서 열리는 학회에 가면 뇌종양 뿐 아니라 뇌출혈 분야도 꼬박 참석했다. 철저히 예습하던 중, 서울로 갈 수 없는 응급환자가 왔고, 그 환자를 살리면서 세부전공이 뇌종양에서 뇌출혈로 바뀌게 됐다.

김 교수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제주대병원은 이전의 제주의료원 건물과 시설을 물려받아 개원해서 서울의 대학병원과 비교하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뇌수술용 현미경도 교통사고 수술 때나 동물실험 때 쓰는, 재래식 외눈 현미경이었다. 홍강의 병원장이 김 교수가 지주막하출혈 수술에 잇따라 성공했다는 희소식을 듣고 수술을 참관하려던 날엔 현미경의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공의가 앰뷸런스를 타고 부랴부랴 인근 한라병원에서 전구를 가져와야만 했다. 김 교수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60대 환자의 수술에 성공했고, 병원장은 구매 팀에 “당장 첨단 전자현미경부터 구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독일에서 물 건너 온 첨단 전자현미경으로 수술하지 못했다. 외눈 현미경으로 지주막하출혈 환자 20여 명의 생명을 구하자, 2003년 2월 서울대병원에서 “뇌출혈을 담당하는 오창완 교수가 분당으로 갈 예정이니 본원으로 오라”고 연락이 왔다.

김 교수는 2003년부터 5년 동안 거의 매일 응급수술을 했고 1주일에 1, 2일은 아침 해를 보면서 퇴근해서 옷만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와야 했다. 전공의들이 3E(Everyday Evening Emergency)라고 불렀지만,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기쁨에 기꺼이 수술실로 향했다. 제주도에서 복귀하고 얼마 동안은 환자들이 진료실에 들어와서 “이름만 보고 여자 의사인 줄 알았는데…”할 정도로 무명이었지만, 실력은 시나브로 소문이 났다.

김정은 교수(가운데)가 서울대병원 수술실에서 뇌출혈 환자를 수술하고 있다.

김 교수는 고3 때 생물교사의 영향을 받아 의대 진학을 결심했지만, 부모는 “의대는 돈이 많이 든다던데…”하며 걱정했다. ‘똑똑한 아들’은 “내가 벌어서 학교 갈 테니 걱정 말라”며 가족을 설득했다. 그러나 학력고사를 치고 의예과(예과)와 의학과(본과) 중 어디에 지원할까 고민할 정도로 의욕만 있었지, 의대에 대해 1도 모른 채로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의학과 4학년 때 ‘생사의 경계에서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심장내과와 신경외과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뇌를 전공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쭉 그 길로 같다. 그는 지금까지 지주막하출혈 1500명, 모야모야병 600명 등 2700여명을 수술했고, 200여 편의 논문을 썼다.

김 교수는 “세계 또는 국내 최초, 국내 최다 이런 것보다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로서 어떤 환자에게 수술해야 할지 방침을 정하고, 표준 치료법을 정립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고 말한다.

그는 2014년 대한뇌혈관외과학회지에 1차성 뇌출혈에 대한 임상진료 지침, 2018년 3월 대한신경외과학회지에 지주막하출혈의 임상진료지침을 발표해서 다른 의사들에게 방향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어른 모야모야병의 세계적 권위자이기도 하다. 모야모야병은 목동맥에서 뇌로 혈액을 보내는, 양쪽 내경(內頸)동맥의 끝부분이 서서히 좁아지고 막히는 병이다. 1957년 일본에서 처음 보고된 이후, 1969년 스즈키 박사와 타카쿠 박사가 뇌영상을 촬영하면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일본어로 ‘모락모락’이라는 뜻의 ‘모야모야병’이란 이름을 붙였다. 동아시아인, 특히 일본과 한국인에게 많이 생기는 뇌혈관질환이다.

한때 어린이만의 병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영상진단법의 발달로 성인에게서 어린이 못지않게 많은 환자가 발견되고 있다. 어른 환자는 여자가 남자보다 2배 이상 많다. 어린이는 수술이 최선의 방법이고, 어른은 수술이 필요 없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 환자에겐 주로 두피의 혈관을 분리해 뇌 표면에 접촉시킨 뒤, 해당 혈관이 자라 뇌에 피를 공급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간접문합술’을 실시한다. 어른은 두피혈관을 잘라서 막힌 혈관 대신 이어주는 ‘직접문합술’을 많이 한다. 김 교수 팀은 2014년 《미국심장•뇌졸중학회지》에 두 가지 수술의 장점을 결합한 ‘복합문합수술법’의 효과가 뛰어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김 교수는 20011년 7월 일본 교토대 연구진과 함께 모야모야병의 주요 유전자를 밝혀내 발표했으며, 2012년과 2014년에는 일본신경외과학회지에 이 병의 임상적 특징과 최신 진단 치료법에 대해 정리하는 ‘종설 논문(Review Article)’을 발표했다. 종설 논문은 한 주제에 대해서 해당 분야 권위자가 기존의 연구결과를 종합하고 포괄적으로 평가해 관점을 제시하는 논문으로 일본 학회가 자신들이 발견한 병에 대해서 평가를 의뢰할 정도로 김 교수의 권위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겁이 없었고, 운이 좋아서 지금의 자리가 가능했다고 여긴다. 뇌종양을 전공했지만 제주대병원에서 고난도 뇌출혈 수술 환자를 살리기 위한 수술에 겁 없이 도전했고, 그곳에서 20여 명을 수술할 때 모두 성공한 것은 하늘이 도왔다고 믿는다. 서울대병원에서 마침 자신을 위한 자리가 났고 한대희, 오창완 교수 등이 자신이 연구할 분야의 바탕을 확실히 다져놓은 것도 행운이었다. 소아청소년과 채종희, 소아신경외과 김승기 교수와 신경외과의 후배 조원상 교수 등 함께 연구하는 의사들과 의기투합할 수 있다는 것도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표준 치료법을 정립해서 여러 의사들에게 나눠 보다 더 많은 환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행운을 나누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요즘에는 수술방 대신에 연구실에서 불을 밝히며 뇌동맥류와 모야모야병의 정체를 탐구하고 표준치료법을 개선하는 데 전력하고 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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