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간 간호사들은 어떻게 살았나?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④독일, 미국으로 떠난 간호사, 의사

독일의 한국인 간호사들은 함께 꿋꿋하게 어려움을 헤쳐가면서 ‘민간외교관’ 역할을 했다.

2014년 연말에 개봉된 영화 《국제시장》에서 오영자(김윤진)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윤덕수(황정민)를 만난다. 영화의 오영자처럼 1960~70년대 1만 여명의 간호사들이 가족을 위해, 또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처음부터 정부 차원에서 간호사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1958년 베네딕트선교회의 파비안 담(Fabian Damn) 신부가 경북 김천의 성의상고(현재의 성의여고) 졸업생 30여 명을 선발해 독일로 보냈다. 이들은 간호학교에 입학해서 시험에 합격한 뒤 정규 간호사가 되었다. 독일 수녀 말가리다의 주선으로 파티마수녀원의 예비수녀 가운데 10명이 독일로 갔다. 이밖에 천주교에서 수녀 후보생과 여학생을 선발해서 독일의 간호학교로 보냈다.

1960년대에 들어서 민간 차원에서 간호사를 모집하여 독일의 병원들에 취업시켰다. 본(Bonn)대학병원 외과에 근무하던 이종수 박사(광주의전, 현 전남대 의대 졸업)와 마인츠(Meinz)대학병원 소아과에 근무하던 이수길 박사가 간호사 모집에 관여하여 여러 병원에 취업을 알선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광산 근로자들과 함께 간호사들이 자리를 같이했다. 함보른 광산의 강당에서 애국가가 울려 펴질 때, 대통령 내외와 600여명의 광부, 간호사들이 함께 눈물을 흘린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독일에 간 간호사들이 열심히 일하고 좋은 평가를 받으니까 1966년 정부 차원(한국해외개발공사)에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를 모집하여 독일에 파견했다. 독일로 취업시키기 위해서 단기과정(3개월 코스)인 간호조무사 훈련과정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 재독한인간호협회는 이 해를 첫 공식 파견년도로 삼아 해마다 기념행사를 연다.

파독 간호사들은 급여를 알뜰살뜰 아껴서 부모형제에게 송금하였다. 우리나라가 공업화를 시작하려고 발버둥을 쳤던 시대였는데, 자금이 매우 부족했다. 마침 독일은행에서 정부에게 대출 편의를 제공했는데, 여기에는 광부와 간호사들의 희생과 근면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960년 중반에 충분한 준비 없이 취업차 독일로 간 간호사들은 취업 초기에 언어, 식사 및 환자 간호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환자 간호에 필요한 기본적인 회화를 배웠고, 일과가 끝나면 기숙사에서 밤늦게까지 독일어를 공부했다. 간호사로서의 전문적인 간호는 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간호사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었다. 파독 간호사들이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기에 평이 좋았다.

서투른 독일어로 환자를 보살피는 일도 힘들었지만, 밥이 아닌 빵으로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것 역시 고통이었다. 일부 병원에선 빵을 먹기 힘들어 하는 간호사들을 위해서 식당 조리사가 쌀을 사다가 우유에 끊여 주는 배려도 했다. 식사 예절로 젓가락 대신 왼손은 포크, 오른손은 나이프를 쥐고 냅킨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생소했다. 식사 중 조용히 대화해야 하고, 음식은 모두 깨끗이 먹어서 접시는 비워야 하는 것 등 새로운 식사 문화가 힘들었다.

한두 해 지나니까 언어소통도 원만해지고, 급여수준도 독일 간호사들과 같아지고, 관광여행도 할 수 있는 등 일상생활에 적응했다. 그러므로 귀국을 하는 간호사는 별로 없었다. 독일에서 결혼하여 계속 일을 하거나, 더러는 미국으로 가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57년 미국에서 외국 의과대학 졸업자를 수련의사로 받는 시험(ECFMG)제도가 생겼는데, 다섯 해쯤 지나면서 시험 합격자가 늘기 시작하였다. 국내에서도 의사가 부족하던 때여서 군의관 복무를 마친 의사가 이민 신청을 하려면 보건소장으로 1년 근무해야 보건사회부에서 이민승인을 했다. 농어촌 지역에 의사가 부족하여 무의촌 과제를 해소하려는 방안으로 전문의수련 중 6개월을 무의촌에 파견 근무토록 법제화하여서 1972년부터 실시하였다.

미국에 간 의사들은 그곳에서 부족한 방사선과, 마취과, 병리과 등에서 수련을 받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 간 의과대학 졸업생의 절반 가까이가 미국으로 진출했다. 김정열 국방부장관 때에 미국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고 귀국해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제도(Kim’s Plan)가 생겼다.

미국에서도 의대 졸업생이 늘었기에 1976년에 외국 의대 졸업자 수용제도가 막을 내렸다. 갑작스런 변동 탓에 우리나라 의사들의 전공의 수련에 문제가 생겼다. 인턴 수련을 받을 수가 없기에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심지어 국회(정일권 국회의장) 본회의에서도 거론됐다.

의과대학이 신, 증설되기 시작하고 의사들이 늘어남으로써 1974년에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군의관 정원을 채우게 되었다. 의대 졸업생이 증가하고, 의사의 미국 이민이 막히다 보니 군의관 인력 과잉 문제가 대두됐다. 1980년에 농어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농특법)을 제정하여 군의관 잉여인력을 농어촌지역에 배치하도록 했다.

한편, 간호사들이 독일과 미국에 진출했기에 보건소와 보건지소에 간호사를 배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므로 가족계획, 모자보건, 결핵 담당에 간호보조원(간호조무사)를 배치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간호사 배출이 증가되고, 해외 진출이 감소하다 보니 간호사들의 취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직종 간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에디터 kormedimd@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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