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의사는?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②해방 전후 의사들과 병원-의대

좌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재필, 현봉학, 석호필, 양유찬, 윤치왕

6.25전쟁 초기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석 달 후 9.28 서울 수복이 됐지만, 중공군 30만 명이 밀고 들어왔다. 눈이 쌓여 군대가 이동하기 힘들었기에 함경도에서 유엔군과 국군이 포위당하게 되자 함경남도 흥남 부두에서 철수 작전이 시작됐다.

함북 성진시(현재 김책시)가 고향인 현봉학(1922~2007)은 1944년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 의대)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는데, 영어에 능통하여 해병대사령부 고문으로 발탁됐다. 전쟁이 치열하였던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이 진행됐을 때 미국 제10군단이 10만 병력이었는데, 현 고문은 군단장 아몬드 소장을 설득하여 각종 무기와 군수품을 바다에 버리고 9만8000여 명의 북한 피난민을 수송선에 태워서 경남 거제에 무사히 도착하게 했다. 흥남철수작전에서 민간인을 무사히 대한민국에 정착하게 한 현 박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잊힐 수 없는 인물로 각인됐을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휴먼스토리의 주인공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를 기리어 2016년에 서울역 세브란스빌딩 앞에 동상을 세웠고, 이듬해에 사단법인 현봉학기념사업회를 설립했다.

현봉학이 미국에서 독립의식을 키울 때 서재필(1864 ~ 1951)을 존경했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은 한학을 배워 18세에 별시문과에 합격했다. 김옥균 등과 사귀게 된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했는데, 청군을 부른 수구파에 밀려서 역적으로 몰렸다. 부인은 자살하고 두 살배기 아기는 굶어죽었다. 생부와 맏형은 감옥에서 절곡 끝에 자결했고 어머니는 노비로 팔려가기 전에 자결했다. 동생도 참형을 당했다. 양아버지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다.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이듬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낮에는 말을 못하는 유색인종으로서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온갖 노동을 하고 밤과 주말엔 기독교청년회와 교회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는 미국 독지가의 후원으로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로 옮겨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비 때문에 자퇴해야만 했다.

서재필은 워싱턴으로 이주해서 미국 육군의 총감부 도서관에 취업, 중국과 일본의 의학서를 번역했다. 이때 의학에 관심을 갖게 돼 워싱턴대학교 의대 야간부에 입학하고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의대생으로 주경야독했다. 그는 1893년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 학사가 됐으며, 미국의사면허를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첫 번째 미국 의사가 된 것이다.

그는 갑오개혁(1894) 후 역적의 죄명이 벗겨져 귀국했고 중추원 고문으로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민주주의를 전파했다. 그러나 러시아, 일본 등의 요구를 수용한 고종에 의해 해임돼 다시 미국으로 가야만 했다. 서재필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미국 육군성의 임명을 받아 미-스페인 전쟁에 종군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3.1운동 제1차 한인자유대회(1919.4.16~19)가 개최됐을 때 회장을 맡았다. 그는‘한국친우회’를 조직해서 미국 상원의원들과 저명인사들이 한국 독립을 지원토록 했으며, 사비를 털어서 국제적으로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유한양행 설립자)은 서재필을 끈근하게 모셨고, 재정 뒷받침을 하였다. 1947년 미국 군정 때 83세의 고령에 최고정무관으로 귀국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조국을 걱정하다가 눈을 감았다.

윤치왕(1895~1982)은 개성, 수원, 북경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언더우드(원두우)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4년에 윤보선과 함께 영국으로 가서 1925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됐으며 산부인과 수련을 2년 받았다. 학비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이 설립한 언더우드타이프라이터 영국지점에서 지원했다. 1927년에 귀국하여 세브란스의전 허스트교수 밑에서 수련을 더 받은 후 1931년에 조교수가 되었다. 1944년에는 경북 김천시 구세군병원에서 일했다.

윤치왕은 아버지가 무과(武科)에 등과하여 군부대신과 육군부장을 지낸 탓인지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 광복이 되자 1949년에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중령으로 임명받았고, 그 해 늦가을 여수순천반란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의무감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1951년에는 준장, 2년 뒤에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육군군의학교 교장이 됐다. 군대에서 의지제작창을 만들어 부상 군인에게 의지(인공 수족)를 만들어주고 제대를 시켰다. 64세에 전역하기 전 10년 동안의 복무 기간에 우리나라 군진의학의 토대를 닦아 마련했다. 영국에서 배운 골프, 댄스, 테니스 등이 수준급이었으며, 대한산부인과학회 회장, 대한결핵협회 회장, 대한의학협회 회장, 서울시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병리학 교수로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윤일선이 윤치왕의 조카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염원한 의사 중에 서양인도 적지 않았다.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있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1889~1970)는 3.1운동에 기여한 바가 커서 33인에 추가하여 34인으로 꼽힌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은 선교사로서 1916~192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 미생물학과 보건학(예방의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박사는 비폭력 독립운동인 3.1운동에 감명을 받고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 교인 학살 사건을 비롯한 3.1운동과 관련되는 각종 사건을 사진과 함께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스코필드 박사는 1957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장학 지원사업도 하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연세의료원 본관에 스코필드 흉상을 제작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그의 유해는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국립현충원 ‘민족의 얼’ 묘소에 안장돼 있다.

미국에서 대한민국 대사로 1951년부터 9년 동안 일한 의사가 있다. 초대 장면대사에 이어 제2대 주미대사가 된 양유찬(1897 ~ 1975)이다. 그는 보스톤대학교 의대를 졸업했지만, 양유찬이 의사 출신이라는 것은 외교부 출신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한민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잘 발전시킨 공로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양유찬은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순화병원

가난하였던 시절. 아프면 약방에 가서 약을 사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병원에 가기는 매우 힘들었다. 병원도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사가 모자라기에 1949년 병원에서 일을 하던 경력자를 대상으로 하여 시험을 치러서 무의지역에서만 진료를 할 수 있는 한지(限地)의사제도를 도입했다.

1950년대에 서울에서는 순화병원에 보낸다고 하면 어린이들이 울음을 그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문에 ‘호랑이와 곶감’ 설화에서 나아가 호랑이가 곶감보다 순화병원을 더 무서워했다는 얘기까지 있다. 순화병원은 대한제국 말기(1908)에 건립을 시작하여 2년 뒤 개원했다. 피(避)병원이라고도 불렀던, 서울 종로구 효자동 부근 옥인동에 있던 전염병환자를 격리하는 병원이었다. 이 병원에 가면 회복돼 퇴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우는 아이의 울음도 그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광복이 되었지만 병원이라고는 지역별로 띄엄띄엄 있었을 뿐이었다. 대한제국 시절에 건립된 병원들이 있었는데 서울에 광혜원(제중원, 현 세브란스병원, 1885), 보구여관(이화여대 병원, 1887), 대한제국 첫 공공병원인 내부병원(서울대병원,1899), 청량리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 1908)이 있었고 전주 예수병원(1898), 광주 기독병원(1905), 대구 동산병원(1899, 계명대 동산병원), 안동 성소병원(1909) 등이 있었다. 그나마 5년 뒤에 북한이 남침을 하였기에 병원도 상당히 파괴됐다. 개인의원에서는 통상 병실을 몇 개씩 가지고 운영하였다.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몰리고 전염병을 비롯하여 각종 질병이 만연하였다. 이에 외국의 종교단체, 구호단체 등에서 재정을 지원하여 병원들이 건립됐다. 전쟁 수도였던 부산에서 메리놀병원(1950), 위생병원(1951), 침례병원(1951), 일신기독병원(1952) 등이 설립되었다.

휴전 후에는 전국 곳곳에서 종교단체들이 병원들을 열었다. 대구의 파티마병원(1956), 인천적십자병원(1956). 의정부성모병원(1957), 부천성모병원(1958), 원주기독병원(1959), 서울 성바오로병원(1961), 수원 성빈센트병원(1967), 대전성모병원(1969) 등이 신설됐다.

6.25에 참전하여 우리를 도왔던 나라 중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스웨덴,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재정 지원하여 1958년 서울에 국립의료원을 건립했다. 흔히 메디칼센터라고 불렀다. 유럽에서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의료기사들도 파견 근무했다.

이곳에서는 국내의 의과대학 졸업생들이 다투어 수련을 받았다. 의사들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북유럽에 가서 수련을 받기도 하였다. 길가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임직원들이 들쳐 메고 병원에 데려와서 진료를 받도록 하기도 하였다. 진료수가를 스웨덴 방식으로 일당 진료비 또는 건당진료비 제도를 시도하였는데, 고액진료비 환자들이 밀려들기에 폐기하였다.

1951년 국민의료법이 공포됐고, 한의사가 제도화됐다. 결핵과 한센병(나병)이 문제였다. 1952년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고 최창순이 초대회장이 되었다. 1956년 대한나협회가 창립됐고 정준모가 초대회장으로 선임됐다.

해방 후 의과대학은 세브란스 의대, 서울대 의대, 대구의과대학, 광주의과대학, 이화여대 의과대학, 서울여자의대의 6개가 있었다. 전시에는 부산, 대구, 광주에서 전시연합대학이 운영돼 의학 교육이 계속 이뤄졌다. 전쟁 중 경북대와 전남대가 설립되면서 대구의과대학은 경북대 의대, 광주의과대학은 전남대 의대로 발전했다.

치과대학은 유일하게 서울대학교에 4년제로 운영되었는데, 1959년에 치의예과가 설치되었다. 1967년에 경희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의대 졸업하면 미국의사시험 보던 시대

1959년 김정렬 국방부장관 때 의과대학과 치과대학 졸업자가 종합병원에서 수련(5년)을 마친 뒤 군복무를 하도록 하는 제도(Kim’s Plan)가 시행됐다. 군으로서는 전문의 과정을 거친 군의관을 확보하고, 의료계에서는 중단 없는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합쳐진 결과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미국에서 전문의 수련을 받은 후 귀국하여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미국에 가려면 1957년에 시작한 외국 의사 자격시험(ECFMG. Educational Commission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에 합격해야 했는데, 정보도 부족했고 영어로 출제돼 시험을 칠 엄두도 내지 못 하였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면서 족보(기출문제 정리)가 생기면서부터 대학 졸업생의 30~50%가 합격했으며, 의사국가시험보다 미국의사시험에 더 신경을 쓴다는 풍문도 있었다.

한의과대학은 1953년에 설립됐는데,1964년에 동양의과대학 한의학과가 출범해서 이듬해에 경희대학교 의대 한의학과로 됐다. 1976년에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으로 바뀌었다.

간호사 양성은 3년제였는데, 1955년에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는 4년제 간호학과가 되었다. 그 후 종합대학교에서는 4년제로 되었으며, 1979년에 간호학교가 간호전문대학으로 되었다. 정규 의료기사 양성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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