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트랜스젠더, 의료 사각지대 놓였다

국내의 트랜스젠더가 필요한 의학적 처지를 받지 못하거나 ‘처방전 없는’ 호르몬 약물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 연구팀은 지난 27일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이번 연구는 한국 성인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경험과 그에 따른 의료 장벽을 분석한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학술 연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설문 조사에는 성인 트랜스젠더 278명이 참여했다. 참여자들은 개별 경험에 따라 기본 정보 외 의료적 트랜지션(transition)의 경험, 의료 접근성, 건강 상태 등 약 160~230개 문항에 응답했다. ‘의료적 트랜지션’이란 트랜스젠더가 받는 정신과 진단, 호르몬 요법, 성전환 수술 등의 의료적 처치를 말한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전체 참여자 가운데 91%(253명)는 성별 정체성에 대한 정신과 진단(성주체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 또 호르몬 요법 문답에 응답한 참여자 276명 가운데 88%(243명)가 호르몬 투여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성전환 수술 여부를 묻는 문항에 응답한 참여자 271명 가운데 42.4%(115명)는 한 가지 이상의 성전환 외과 수술을 받은 적 있다고 답했다.

참여자들이 정신과 진단, 호르몬 요법 등 의료적 처치를 받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높은 비용 때문이었다. 성주체성 장애 진단을 받지 않은 25명 가운데 12명(48%)이 정신과 진단을 받지 못한 이유로 ‘경제적 부담’을 꼽았다. 성전환 관련 수술을 받지 않은 156명 중 122명(78.2%) 역시 ‘수술 비용이 너무 비싸서’라고 응답했다.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성주체성 장애 진단을 위한 정신과 진료 비용을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참여자(67.7%, 170명)가 ’25~49만 원’을 지출했다고 답했다. 가슴, 생식 기관 제거, 성기·안면·성대 성형 등의 성전환 관련 수술 중 비용 부담이 가장 높은 수술은 성기 성형 수술이었다. 성기 성형을 위해 트랜스 여성은 평균 1515만 원, 트랜스 남성은 평균 2057만 원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났다.

높은 의료 비용과 함께 적절한 의료적 처치를 받을 수 있는 의료 기관이 부족한 점도 문제였다. 일부 참여자들은 ‘제대로 진단해 주는 정신과를 찾을 수 없어서’, ‘호르몬 조치를 제공하는 의료 기관이 없어서’ 의료적 처치를 받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같은 결과에는 트랜스젠더 건강에 대한 의료진의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과 낮은 지식 수준이 문제 사항으로 꼽혔다. 2014년 국가인간위원회가 발표한 실태 조사에 따르면, 5년간 의료 기관을 이용한 적 있는 트랜스젠더 78명 중 28명(35.9%)이 의료진에게 부적절한 질문, 비난을 받았다고 답했다.

연구팀은 북미·유럽에서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처리를 위한 의료진 교육과 수련 과정을 개발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 의과 대학의 교육 과정에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되지 않아 의료적 처치에 대한 한국 의료 전문가의 지식 수준이 낮다고 지적했다.

연구팀은 “트랜스젠더가 겪는 다양한 장벽은 트랜스젠더가 안전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의료적 처리를 시도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병원의 처방 없이 호르몬을 구입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참여자는 243명 중 61명(25.1%)이었다. 이들은 국내외 온라인 판매자 또는 지인을 통해 처방전 없이 구매 가능한 호르몬제를 구입했다.

연구팀은 “이번 설문 조사 결과가 한국에 거주하는 전체 트랜스젠더 인구 집단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2018년 현재까지 국내 트랜스젠더 인구 규모를 파악하기 위한 국가·민간 단위의 조사가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이들은 “대표성 측면에서 여러 한계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연구는 한국에서 진행된 가장 큰 규모의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라며 “향후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논의 등 한국 트랜스젠더 건강에 대한 더욱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한국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 관련 경험과 장벽 : 정신과 진단, 호르몬 조치, 성전환 수술을 중심으로’)는 ‘한국역학회지(Epidemiology and Health)’ 최신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학술지 홈페이지(www.e-epih.org)에서 한국어 논문을 확인할 수 있다.

    맹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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