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성폭력 가해자가 되었나?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시인이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기고한 시 ‘괴물’이 화제다. 해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문단 원로 고은 시인을 연상케 하는 내용 때문이다.

고은 시인도 이런 정황을 의식하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마도 30여 년 전 어느 출판사 송년회였던 것 같은데, 여러 문인들이 같이 있는 공개된 자리였고, 술 먹고 격려도 하느라 손목도 잡고 했던 것 같다”며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오늘날에 비추어 희롱으로 규정된다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뉘우친다”고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최영미 시인은 6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그 당사자로 지목된 문인이 제가 시를 쓸 때 처음 떠올린 문인이 맞다면 굉장히 구차한 변명이라고 생각한다“라며 “그는 상습범”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 두 번이 아니라 정말 여러 차례 너무나 많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목격했고 혹은 피해를 봤다”라고 덧붙였다.


“그럼, 그때 싫다고 말했어야지!”

검찰 조직 내 성폭력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에 이어서 최영미 시인의 ‘괴물’은 문단 내 성폭력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검찰이든 문단이든 권력을 쥔 남성의 일상적인 성폭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성폭력 피해자 변호를 주로 맡고 있는 이은의 변호사는 “한국의 성폭력은 성적 끌림에서 일어난 성범죄라기보다는 사회적 성격을 가진 권력형 성범죄”라고 규정한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신보라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가 증가했다. 주로 고용자와 피고용자 등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범죄는 2012년 341건부터 꾸준히 증가 추세로 2017년에는 8월까지만 370건이 발생했다. 여성가족부의 ‘2015년 성희롱 실태 조사’도 직장 내 성희롱 가해자를 상급자로 지목한다.

실제로 하급자가 상급자를 희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직 서열에서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상급자에게 하급자가 “노”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상사는 ‘잘 보여야 할 존재’이다. 즉, 조직 내 성폭력은 이은의 변호사의 지적처럼 남녀 문제가 아닌 서열의 문제이다.

게다가 조직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저지른 성범죄는 은폐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직장 상사의 범죄에 맞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지현 검사나 최영미 시인이 “그때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뒤늦게 공개 폭로 형식으로 피해자를 고발하는 것은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였잖아?”

조직 내 성추행은 권위 과시적 목적이 크다. 성 범죄자를 심리적 특성에 따라 분류하면, 조직 내 성추행은 ‘힘의 과시형’ 성 범죄다. 힘의 과시형 성범죄는 자신의 우월성, 통제를 매개로 성범죄를 저지른다. 이성애에 바탕을 둔 성적 만족감보다는 자신의 권력, 성적 매력을 과시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은의 변호사는 “그럴 만한 관계가 아닌데 일방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잘못을 해도 되는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그 높은 지위를 재차 확인 받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인지적 왜곡도 성추행 발생에 영향을 미친다. 인지적 왜곡은 범죄 행동을 지지하는 부정확한 생각, 태도, 신념 등을 일컫는다. 주로 우월한 위치의 가해자는 상대방의 인권을 소홀히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상대방도 ‘원했다’는 심각한 오해를 하기도 한다.

성추행 가해자의 변명 가운데 하나가 “우리는 사귀는 사이였어”라는 것은 그 방증이다. 이은의 변호사가 실제로 변호를 했던 한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는 “사귀는 사이였다”며 “나를 보며 유난히 활짝 웃었다”, “카톡에서 이모티콘을 자주 썼다” 등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직장 동료 간의 단순한 친근감의 표시가, 상사에게 갖추는 예의가 애정 표시로 둔갑한 것이다.

한국 성범죄는 증가 추세?

한국의 성범죄율은 세계적으로도 손가락 안에 든다. 증가 속도도 빠르다. 그렇다면, 과거에 없었던 성범죄가 늘어난 것일까? 전문가는 성범죄가 증가 추세라기보다는, 신고하거나 표면으로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다고 본다. 예전에 비해서 실질적 성추행 사례가 늘어났다고만 보기에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전에는 쉬쉬하는 분위기가 많았고 지금의 미투(me too) 운동처럼 폭로하지 못했다”며 “이제는 최소한 상담이라도 받으려고 한다”고 최근의 변화를 설명했다.

[사진=JTBC]

    연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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