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아줌마께 드린 행운의 종

칼국수 아줌마의 수육 한 접시

이재태의 종이야기 – 59. 칼국수 아줌마의 수육 한 접시

창밖에 눈이 옵니다. 모든 갈등과 꼴불견의 풍경들을 순식간에 덮어버리는 화해와 평온함의 눈입니다. 2년 전 이맘때쯤 눈을 내려 보내는 저 위쪽으로 영원히 가신 칼국수 아줌마에게 드렸던 행운의 종(Lucky Bell)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불러내었습니다.

2014년 9월2일 (화)

오늘 저녁에는 더위를 씻어주는 비가 내렸습니다. 연구과제 발표모임을 마치고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참석자들과 병원 옆에 있는 칼국수 식당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소주를 한잔 겸한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계산대에 나와 있던 칼국수집 아줌마를 만났습니다. 오래 만에 만났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갑자기 사진 한 컷을 같이 찍자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 식당은 지난 20여 년간 감칠맛 나는 칼국수로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 지금 아줌마는 시내에 몇 개의 분점을 둔 ‘우리 동네 회장님 급’인 칼국수 체인의 사장님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어떤 작은 음식점에 가도 주인을 ‘사장님’이라 부르는데, 옛날부터 이 분을 칼국수 아줌마라고 불러왔기에 아직도 ‘아줌마’란 호칭이 입에서 저절로 나옵니다.

저는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3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군복무, 외국 연구원 생활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이 동네에서만 직장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주거지는 몇 군데 옮겨 다녔으나, 직장은 한 곳에만 머물렀습니다. 전공의 시절에는 병원 내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였으나, 교수로 부임한 1989년 이후에는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하여 병원 근처의 식당을 열심히 기웃거린 것 같습니다.

이 칼국수 집은 콩가루를 무친 고소한 칼국수와 파전, 돼지수육을 주로 취급하고, 보리밥, 된장국에 채소를 비벼먹는 야채밥도 일미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린 시절 집에서 먹던 경상도 안동식 칼국수와 된장에 비벼먹는 보리밥 맛을 그리워하는 단골 고객들이 많아지며 이 집은 대구의 대표 맛집이 되었습니다. 20년 전 뒷골목의 조그만 하꼬방(판잣집)에서 국수집을 시작하였던 이 분은, 그 덕분에 대로변에 비교적 괜찮은 건물을 구입한 성공한 식당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에게도 인생이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았습니다. 이제 고생은 다했다 싶으니, 어려운 시절을 같이하며 구멍가게 칼국수 식당을 일으킨 남편께서 폐암으로 고생하시다가 몇 년 전 우리병원에서 작고하셨습니다. 그때 아줌마의 망연자실해하던 표정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줌마도 젊어서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잔병치례를 자주 했었는데, 마침내는 남편 보내고 조금 지나지 않은 재작년인가에 큰 병이 생겼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비수도권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분도 서울의 큰 병원에 가셔서 수술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아니, 남편분이 세상을 떠난 우리 병원에 입원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에서 완전히 치료를 하고 왔다는 아줌마의 말씀에 축하를 해드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1-2년 지났을까요? 주변으로부터 최근 아줌마의 암이 재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동료 교수는 제법 심하게 재발하여 수술이나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 뒤에도 이 칼국수 집에 가끔 갔으나, 아줌마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가끔 주말이나, 저녁시간에 병원으로 나오는 길에 이 집 앞을 지날 때 칼국수 집의 문이 잠겨있으면,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마침내 아줌마를 다시 만났습니다. 오래 만에 식당에 나왔답니다. 그런데 얼굴이 조금 푸석푸석하기는 하나 병색이 완연한 환자의 얼굴이 아니고 인상도 넉넉해 보였습니다. ‘아줌마 괜찮으세요?’하고 용기를 내어 물었습니다. 아주 괜찮은 것은 아니나, 견딜만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가끔 있고, 특히 식당이 정기적으로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아줌마의 병이나 유고 때문에 문을 닫은 게 아니냐는 전화를 자주 받는다고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오래 만에 아줌마를 보니 가슴이 뭉클하여, 아줌마와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탁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때와 비교하려면, 지금이라도 사진 한 장을 찍어 두어야 한다고 에둘러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줌마는 처음 찍은 사진에서는 잘 웃지 못했다며, 웃는 얼굴을 하며 다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2014년 9월 2일 칼국수 아줌마와 함께)

사실. 저는 이 분에게 진 마음의 빚이 있습니다. 3년 수개월 전에 병원장 공모에 나가서 낙방을 하였습니다. 닭 벼슬보다 더 나을게 없다는 교수의 보직에 크게 집착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불합리하게 진행되어지던 선임 과정이 실망스럽더군요. 물론 애써 태연하려 노력했습니다만, 처음 예상보다는 더 깊은 마음의 상처가 남더군요.

그 즈음의 어느 휴일 날에 병원에 나와서 일을 하다가 점심식사를 위해 혼자서 이 집에 갔습니다. 칼국수를 시켜놓고, 멀뚱멀뚱 앉아있으니 아줌마가 돼지고기 수육을 접시에 담아와 맛있게 먹고 힘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제가 병원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는데, 아쉽다면서 칼국수 값보다 비싼 것이 틀림없는 맛있는 부위의 수육을 챙겨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더 보태더군요. “선생님은 착해 빠져서 그런 경쟁에서는 이길 수 없어요. 그런 싸움 장은 모진 사람이 나가는 곳이에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히 착하지도 않고, 다른 동료 교수들보다는 더 약아빠진 중년의 남성입니다. 갑자기 머리통을 무엇에 심하게 한방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손님들도 근처에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습니다. 말없이, 그리고 정신없이 돼지고기 수육과 칼국수를 먹고는 황망히 자리를 떴습니다.

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식당을 출입하면서도 이분을 건성으로 대하고 농담이나 하고 지냈습니다. 이 주인장 아줌마에게 의례적으로만 대하였고, 작고한 남편이나 이분을 한 번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걱정해 준 바가 없었습니다. 항상 저보다도 덜 배우고, 저보다도 생각도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칼국수 아줌마가 감히 대학병원의 교수인 저를 진정으로 위로하며 걱정을 해 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연구실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이런 이야기라도 해주는 분이 나의 근처에 계신다는 사실이 갑자기 고마워졌습니다. 부끄럽지만, 아줌마의 따뜻한 한마디는 저 스스로를 추스르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마침내 그리고 처음으로 이 아줌마가 마음 속 깊이 걱정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아줌마의 병세가 호전되어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사진처럼 웃는 모습의 아줌마를 오래오래 더 뵐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 다음 날 저녁에 아줌마를 다시 찾아가서 ‘행운의 종(Good Luck Bell)’을 드렸습니다. 영국에서 만든 이 종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아기 요정이 받는 분의 행운을 기원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은 요정이 아줌마를 지켜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 행운의 종 Good Luck Bell, 1970년경 영국)

2015년 1월 3일

새해 첫날을 시작하던 어제 칼국수 아줌마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행운의 종은 별 효과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동지 날에 식당에 간 동료들에게, 동지 팥죽을 쑤어서 나누어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불과 열흘 만에 애통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제가 아줌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3주전이었습니다. 점심시간에 이 식당에서 어느 분을 만났었는데, 그 분이 어느 죽집의 포장 박스에 집에서 키운 농작물을 담아 주었습니다. 제가 들고 있던 죽집의 박스를 본 아줌마는 “선생님 속이 불편하셔요? 죽은 제가 맛있게 쑤어 드릴까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죽집의 박스에 무엇을 넣은 것 뿐 이에요”하고 나왔던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아줌마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하였습니다. 사실, 조문을 가기 직전 조의금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하고 조금 고민하였습니다. 우리의 관혼상제는 서로 도와가며 주고받는 것이기에, 조의금 액수를 조금 생각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상주인 아들은 아줌마의 뜻이라며 조위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병원식구 덕분에 잘 지냈는데, 절대 폐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을 남겼답니다. 잠시 동안 한심한 생각을 한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다른 병원에 근무 중인 김성호선생의 회고를 더 합니다.

“내과 전공의를 마치고, 전방의 군의관으로 있던 2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휴가차 대구로 와서 병원의 교수님들과 후배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며 이 칼국수 집을 찾았습니다. 박봉의 군의관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칼국수정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교수님들이랑 후배들을 배웅한 후, 계산을 하려는데 지갑이 없었습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습니다. 교수님께 다시 계산을 요청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저를 보고 사장님이 먼저 말씀하시더군요. 선생님! 저 선생님 알아요. 내과 레지던트로 계셨잖아요. 지갑 두고 오신 모양인데 다음에 근처에 올 일 있으면 그 때 주셔도 되요. 그래서 몇 개월 뒤, 다음 휴가를 받았을 때에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집을 찾아가서 외상 밥값을 갚은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넉넉하고 따뜻하셨던, 칼국수 아줌마 故김재향 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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