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석에서도 완전무장… 전설이 된 불굴의 영웅

이재태의 종 이야기(48)

스코틀랜드의 영웅 ‘롭 로이’와 나의 친구 ‘로베르 롸’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직종은 중고 자동차 딜러와 골동품 판매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 현장 확인이 어려운 사이버 거래에서 진품인 물건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선량한 판매자들을 우선 의심해 보아야 하는 불편함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을 수집하며 만나게 된 멋진 외국 친구들도 많다. 이들은 전자우편과 인터넷의 사용이 활발해진 후, 미국의 종 수집가 모임에 참여한 이후에 알게 된 분들이다. 대부분 나이가 많고, 다양한 인생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에게서 종에 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화, 예술,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때로는 그들의 소소한 일상 생활 이야기나, 집안에 기르던 애완동물의 사망 소식도 전해 듣는다. 가끔은 내가 한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에 관한 여러 종류의 질문을 보내온다. 특히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노병(老兵)들이나,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 사람을 만나면 종 이야기는 아예 뒷전이고, 그들의 인생살이와 우리나라와 얽힌 사연들을 듣는데 몰두하게 된다. 낙동강전투 사진들을 찾아 보내주었다고 감사의 카드를 받기도 하였다. 

나의 종 수집에서 가장 중요한 멘토(mentor, 스승)는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롭 로이(Rob Roy)라는 사람이다. 그는 종 수집가이지만 때로는 수집품 중 일부를 경매로 판매하기도 한다. 그가 판매하는 종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유래가 있는 명품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경매에서 그의 종을 구하기 위하여 밤잠을 설친다. 오랜 기다림 끝에 구입한 종이 도착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한 번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오랜 친구가 보내준 선물을 받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메일을 보내 문의하고 있으며, 그는 지난 15년 동안 언제나 친절하고 성실하게 답을 해 주었다. 전직 화학교사인 그는 60년대에 캐나다 해군에 복무하며 홍콩에서 생활한 적은 있으나, 한국은 방문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의 집으로 초청을 받기도 했으나, 아직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다.

어느 날 경매 사이트를 살피다가 ‘롭 로이 종 (Rob Roy Bell)’라는 이름의 청동 인물 종을 발견하였다. 왼손에 방패, 오른 손에 창을 든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 차림의 병사가 조각된 25cm 높이의 청동 탁상종인데, 그 이름이 우선 눈에 익었기에 구입을 하였다. 그리고는 캐나다의 롭 로이에게 ‘오늘 청동 조각상의 이름이 당신과 같아 종을 구입하였는데, 혹시 당신들의 조상과 관련된 종이 아니냐?’고 메일을 보냈다. 바로 답이 왔다. 그의 가족은 프랑스 이민 혈통이며 프랑스어를 쓰는 캐나다의 퀘벡에 오랫동안 살다가, 50년 전에 토론토로 이사를 왔단다. 그의 원래 이름도 프랑스어로 ‘로베르 롸(Robért Roi)’인데, 불어권에서 영어권으로 생활터전을 옮기면서 주변과 어울리기 위하여 이름을 로버트 로이(Robert Roy)라는 영어식으로 바꾸었다. 그후, 영어식 애칭인 ‘롭 로이’로 불려진다고 했다. 원래 이름과는 달라진 이 영어식 이름이 싫다고 하며, 종의 인물은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스코틀랜드의 영웅인 ‘롭 로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50년 전에 잃어버린 프랑스 이름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옛날 거닐던 강가에.. 이슬 젖은 풀잎. 그리워라 애니 로리 언제나 오려나.. 그대와 만나던 세월 흘렀어도… 그리워라 애니 로리…. 꿈 속에 보이네…’

‘애니 로리(Annie Laurie)’는 아름답고 애잔한 스코틀랜드의 노래이다. 가사는 17세기 말 윌리엄 더글러스가 사랑했으나 결혼하지 못했던 귀족의 딸 ‘안나 로리’를 그리워하며 쓴 시였고, 1825년에 존 스콧이 멜로디를 붙였다. 크림전쟁에 참여한 스코틀랜드 군인들이 고향의 여인들을 그리며 불러서 세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안나의 아버지는 딸을 사모하던 윌리엄이 ‘재커바이트(Jacobite)’이므로 끝까지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커바이트는 명예혁명 후 스코틀랜드로 망명한 스튜어트왕가의 제임스 2세와 그 자손을 정통 영국 왕으로 지지한 가톨릭교도가 중심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영국과 개신교를 신봉하는 스코틀랜드의 왕족들로 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다. 이렇듯이 잉글랜드와 오랫동안 투쟁을 하였던 스코틀랜드에는 피와 눈물이 담긴 복잡하고 슬픈 역사가 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는 잉글랜드에 들어온 앵글로-색슨족에 밀려난 원주민인 켈트족이 브리튼 섬의 북쪽에 건설한 왕국이었다. 앵글로-색슨족도 1066년 노르만의 윌리엄에게 정복되어 잉글랜드 왕국이 탄생한 것이다. 13세기 중반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1세는 웨일즈를 합병하고, 1296년에는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존 1세 왕을 폐위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루 머레이가 거병하였고,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을 격파하게 된다.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윌리엄은 존 1세의 근위대장이 되어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나, 1298년 에드워드왕이 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윌리스의 군대를 격파한다. 윌리스는 탈주하고, 존 코민과 로버트 브루스가 윌리스의 자리를 계승하여 잉글랜드에 대항한다. 윌리스는 1305년 잉글랜드 군에 체포되어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당했다. 그는 ‘자유는 고생스럽고 가혹한 현실이다. 짐승처럼 노예로 굴하는 것보다는 행복하게 죽음을 택하는 것이 바로 사람다운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월리스의 영웅적인 행동과 스코틀랜드 인들의 불굴의 투쟁을 그린 영화가 멜 깁슨 주연의 1995년 상영된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이다.

로버트 브루스는 1306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가 되었고, 이후에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승패를 번갈아가며 싸운다. 1314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는 대병력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였으나, 배녹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지금도 스코틀랜드인은 이 전투를 스코틀랜드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다.

교황의 중재로 1320년 양국의 전쟁은 종결되었고, 스코틀랜드 왕국은 수 백년 동안 잉글랜드와 전쟁과 협상을 계속하며 독립을 유지한다. 이후 두 나라는 왕족간의 결혼으로 연결되었고, 스코틀랜드 왕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거나 두 나라의 왕을 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스코틀랜드가 복종적이지 않았으므로 수 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특히 왕위계승 갈등과 종교개혁은 스코틀랜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가톨릭에 대항하여 성공회를 독립시키고 스스로 수장이 되었다. 그는 조카였던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5세에게 성공회를 강요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전쟁이 이어지고 가톨릭 신자들인 ‘재커바이트’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스코틀랜드 군은 궤멸되었다. 결국은 1707년 연합법으로 두 나라는 통합되었고, 오늘날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롭 로이(Rob Roy)라 불려지는 로버트 로이 맥그리거(Robert Roy MacGregor, 1671 – 1734)는 오랫동안 ‘스코틀랜드의 무법자’였으나, 사망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는 ‘스코틀랜드의 로빈 후드’ ‘진정한 스코틀랜드의 영웅’이 된 역사 속의 인물이다.

그는 1671년 스코틀랜드의 맥그리거 클랜(씨족, Clan)의 막내로 하이랜드(Highland, 고지대)의 글렌가일에서 태어났다. 18세에 하일랜드의 많은 부족과 같이 던디자작이 이끄는 제커바이트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몇 차례 승리하기도 했으나, 던디자작이 전투에서 패하며 죽는다. 전투에 참여하였던 그의 아버지는 투옥되었고, 롭 로이는 클랜의 대표가 된다. 클랜은 양떼 목축을 하며 살았는데, 그는 클랜을 엄격하게 이끌며 존경받는 목동이자 지도자가 되었다.

41세인 1712년 롭 로이는 클랜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몬트로스 백작으로부터 1천 기니를 빌린다. 신임하던 목동 대장에게 돈을 주어 소를 사오도록 하였으나,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클랜과 롭 로이는 돈과 소를 잃고, 엄청난 부채를 짊어지게 된다. 그는 범법자가 되었고 체포당할 상황이 되자 북쪽으로 도피한다. 그의 부인과 가족들도 가택에서 추방되고 집은 불태워졌다. 결국 몬트로스 백작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자, 분노한 롭 로이는 백작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복수의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 1719년 그의 스코틀랜드 자커바이트과 연합한 스페인의 가톨릭 원정군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왕국 연합군과의 전투에서는 패하며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어진 전투에서도 패하며 3번이나 생포되었지만 그때마다 탈출에 성공하여 끈임없이 싸웠다. 1725년 마지막으로 생포되어 투옥되었을 때는, 그의 투쟁의 결과로 공식적으로는 채무를 완전히 면제받았다고 한다. 2년 뒤 최종적으로 사면이 되었고, 이후 가족과 지내다가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하기 직전 적군이었던 사람이 병석으로 찾아오자, 완전 무장한 전투복을 입혀 달라고 하며 ‘롭 로이는 무장이 없는 무방비 상태를 적에게 보여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가 떠나자, ‘우리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백 파이프 음악 연주를 부탁하였고, 음악이 끝나자 운명했다고 한다.

영국인들이나 스코틀랜드 지배층은 그를 ‘범법자, 무뢰한’으로 치부했으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그는 평생 용감하게 잉글랜드와 투쟁한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점차적으로 그의 생애는 영국에서도 전설이 되어갔다. 18세기에는 그에 관한 소설 ‘하이랜드의 무뢰한’이 출간되었다. ‘아이반 호’의 작가 월터 스코트의 ‘롭 로이’가 출판되면서 그는 더욱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롭 로이 서주(prelude)”를 작곡하였고,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도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여 ‘롭 로이의 무덤’란 시를 남겼다. ‘롭 로이’ 영화도 여러편 만들어졌는데, 1995년에 리엄 니선 주연한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절찬리에 상영되었다. 1894년 뉴욕의 월드로프 호텔의 바텐더는 스카치 위스키를 바탕으로 주황색을 띈 강렬한 색을 띄우고 체리를 넣은 칵테일을 만들어 ‘롭 로이’에게 헌정하였다.

20세기 중 후반 북해의 유전 개발과 금융의 발전으로 스코틀랜드의 산업과 문화가 부흥하며,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열망하는 분위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합병으로 소멸되었던 스코틀랜드 의회가 1998년 부활하면서 자치권 운동도 일어났다. 마침내 2014년 9월에는 독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으나, 55%의 반대로 독립안은 부결되었다. 2014년은 스코틀랜드 자존심의 상징인 배녹번 승전이 있은 지 700년이 되던 해였다.

나에게는 불굴의 영웅 ‘롭 로이’와 평생 성실하고 잔잔한 삶을 살고있는 캐나다의 노신사 ‘로베르 롸’, 이 두 사람의 인생 모두가 멋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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