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만큼 충격… 실직 중년 ‘외상후스트레스’

지난해말 모 대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퇴직한 김모(52)씨는 요즘 집 근처의 정신건강의학과에 자주 들른다. 퇴직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는 병원을 찾았다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판정을 받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끔찍한 경험을 한 뒤에 생긴다는 이 병을 내가 앓고 있다니…”

25년여 동안 근무한 직장에서 떠밀려 퇴사한 그는 엄청난 배신감으로 퇴직 첫날부터 밤잠을 못 이루는 등 우울증세를 보였다. 10개월치 월급 명퇴금을 받고 회사를 나올 때 동료들과 송별연조차 못하고 나온 그였다. 누구보다 회사에 충성했고 기여도가 컸다고 자부했던 그는 갑자기 헌신짝처럼 버려졌다는 생각에 지금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금융권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휘몰아치면서 김씨처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실직 중년남성이 늘고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1955년~1963년생)의 은퇴를 남 일처럼 지켜보다 김씨처럼 갑자기 퇴직 압력을 받으면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마련이다. 이라크전 참전 미군들 사이에서 많이 나타나던 이 병이 실직한 국내 중년남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 장애의 일종인 PTSD는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을 겪은 사람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또한 김씨처럼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이후에도 발생할 수 있다.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며 힘들던 경험과 관련된 생각 등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거나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는 등 고립감이나 사회적 위축을 초래해 가족들까지 힘들게 할 수 있다. 김씨의 부인 박모(49)씨는 “남편이 퇴직후 가족들과 말도 않고 지낸다. 전 직장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가족들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고려대 김승섭 교수(보건정책관리학부)는 “정리해고 등은 전쟁포로로 잡혔던 경험만큼이나 우리 몸에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면서 “많은 의학논문들이 해고로 인한 생계곤란과 사회적 관계의 단절이 건강을 악화시켜 심장마비, 우울증, 자살행동의 발생을 증가시키고 이는 사망률의 증가로 이어진다고 보고하고 있다”고 했다.

김씨가 앓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내성적인 직장인이 갑작스런 퇴직 통보를 받거나 실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정신적 외상)를 겪으면서 자주 발생한다. 자신을 밀어낸 회사 상사나 동료들 얼굴이 자꾸 떠오르거나 꿈에 나타나는 ‘재경험’ 증상이 있을 수 있다. 공황장애나 우울증 등은 외부적인 스트레스와 함께 환자 자신의 요인도 많이 작용한다. 이에 비해 PTSD는 정신적 외상이 가장 큰 작용을 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김씨처럼 예기치 않은 실직을 겪은 모든 사람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퇴직후 많은 사람들이 급성 스트레스 장애를 겪지만 한달 뒤에는 대부분 상태가 호전되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다. 퇴직 후 한달이 지나도 증상이 계속될 경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진단되고 있다.

명지병원 외상심리치유센터 배활립 센터장(정신건강의학과)은 “외상후 스트레스 치료과정에선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의 도움도 필요하다”면서 “충격을 경험한 환자들은 내면적으로 정리하는 데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일 뿐이라고 이해하면서 공감을 해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증상이 있는데도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엔 설득해서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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